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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현장 ‘톡’]탈북 청년, ‘한반도’를 말하다
2018-11-13 13:57 정치

언젠가 통일의 주역이 될 탈북 청년들이 바라보는 한반도를 다루고 싶었다. 통일을 ‘간이 체험’한 탈북 청년들이 남한에서 어떤 걸 겪었고, 또 어떤 걸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이 살아온 남한은 어떤 곳일까.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해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한반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들여다본다. 탈북 청년들의 인생, 그 자체로 통일 한반도를 위한 ‘보물’이다.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나이는 9살.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넌 후 중국, 몽골을 거쳐 남한에 도착했다. 부모님이 어린 형제를 데리고 북한을 떠난 이유는 하나, ‘신분의 한계’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평양대 기계종합대학을 졸업했어요. 평양의 직장으로 보장받는 학력이죠. 그런데 할아버지가 북한 일본강점기에 동경대를 나오셨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남포로 떠나셔야 했어요. 몇몇 친척이 중국에 살고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됐죠.”

그 후로도 김여명 씨 가족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도, 김 씨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수업을 듣지 못했다.

“학교에서 준비물로 ‘벽돌’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희 집은 그럴 형편이 못 됐죠. 학교를 가도, 전 수업을 듣지 못했어요. 벽돌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한 벌로 물을 길러 다녔어요, 매일….”

한국은 기회의 땅? 

한국에 와서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됐을 때, 그래서 더 설렜다. 여기선 더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입학하고 처음 만난 선생님들은 김 씨를 불러 ‘탈북민이란 걸 숨기라’고 가르쳤다.

“선생님들이 조심하라고, 북한에서 온 걸 밝히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북한 사투리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강원도에서 전학 왔다고, 그렇게 친구들한테 소개하셨어요.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거잖아요. 지방에서 올라온 다른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니 제가 강원도 출신이 아니란 건 금방 티가 났죠. 또 부모님들끼리 교류할 상황들이 생기다보니, 자연스럽게 친구 부모님들이 제가 북한 출신이란 걸 알게 되셨고 친구들도 알게 됐어요.”

친구들도 넘어야 할 벽이었다. 남한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친구들 사이에 인기를 끌던 영화 ‘실미도’. 박정희 정권 시절 남한 군부가 북파 공작원을 양성하는 내용의 영화는 어린 친구들을 자극했다. 그 여파가 김 씨에게 오롯이 다가왔다.

“친구들이 영화를 보고 와서는 저보고 ‘간첩’이라거나, ‘무장공비’라며 놀려댔죠. 주먹다짐도 여러 번 했어요. 다행이 담임선생님께서 중재를 잘 해주셨어요. 친구들에게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주시며 이해시키려 노력하셨죠.”

하지만 김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히 친구들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그 방법으로 선택한 건 북한에서 몸에 익힌 ‘봉사’와 ‘솔선수범’이었다.

남한 친구들은 이상하게 청소를 싫어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청소는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늦게까지 남아 친구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청소를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잘하지 못하는 건 먼저 나서서 도와줬다. 어려서부터 무언가 만들기를 잘 하던 그는 종이접기 시간마다 서툰 친구들을 도와줬고, 그렇게 친한 친구를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 반장도 했고, 전교 부회장도 했다. 친구들은 김 씨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처음으로 남한 땅에서 ‘유리천장’을 깨고 노력해서 일군 결과물이었다.

처음 본 지구본, 그 충격 

하지만 노력해도 쉽지 않던 게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회’ 과목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세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국에 와서 지구본을 처음 봤어요. 충격적이었죠. 북한에서는 그냥 ‘북한’과 주적인 ‘미국’이 세계의 전부에요. 세계가 이렇게 넓고, 수많은 역사가 존재한다는 걸 처음 본거에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죠. 그나마 평양에서는 조선중앙TV도 보고, 노동신문도 보고 하지만 지방에선 사실 TV도, 신문도, 완전 단절되어 있어요. 특히 어린 나이에는 더더욱 그렇고요.”

‘언어’의 장벽도 뛰어 넘기 버거웠다. 친구들의 대화 속에는 처음 듣는 생소한 외래어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으로 섞여있었다.

“한 친구가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고 했어요. 햄버거, 살면서 처음 들어본 단어였어요. 근데 처음엔 그게 뭐냐고 물어보질 못했어요. 학생들만 쓰는 용어들도 많잖아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죠. 물어보기는 좀 그렇고, 모르는 걸 티내기도 그런 애매한 상황이 이어졌죠. 그러다보니 대화가 안 되더라고요. 나중에 친한 친구가 생긴 뒤에는 정말 매일 물어봤어요.”

‘블록체인 계의 영 리더’가 되기까지 

김여명 씨의 부모님은 목숨을 걸고 넘어온 남한 땅에서 자식들에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렇게 두 분 모두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이 남한 땅에서 어떻게든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고 싶다고요. 본인들이 누려야 할 많은 걸 포기하며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박사 학위도 받으셨어요. 그런 부모님을 정말 존경하고, 전 무엇이든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10년이 넘게 걸린 부모님의 공부는 단 한 번도 가족 여행이나 외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늘 바빴고 또 늘 가난했다. 그런 환경은 김 씨에게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다는 욕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김 씨는 어려서부터 ‘창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때부터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뭐든 잘 만드는 능력을 키우고자 기계공학과에 들어갔고, 정말 최선을 다해 다양한 지식을 익혀 나갔다.

김 씨는 지난해 중국에서 3D 프린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빠르게 변화하는 ‘블록체인’이라는 신 분야를 접했다. ‘공공거래 장부’라고 불리는 블록체인은 가상 화폐인 ‘비트코인’ 거래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해킹을 막는 ‘암호화’ 기술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 씨는 ‘인블록’이라는 블록체인 개발회사를 설립했고, 현재 4명의 이사진을 포함한 총 8명의 구성원들이 회사를 일궈나가고 있다.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블록체인을 개발해 판매합니다. 지난 6월엔 법인 설립을 완료했어요. 사실 시작은 학교 동아리였어요. 제가 올해 초에 한양대에서 블록체인 동아리를 만들고, 거기에서 만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사업을 시작한거죠.”

그렇게 김 씨는 꿈을 이뤘고, 지금도 이뤄나가고 있다.

“‘공짜’는 당연한 게 아니더라고요” 

김 씨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지냈다. 그런 김 씨에게 ‘공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배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차를 탈 때 돈을 낸다는 개념 자체가 김 씨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탈북민 정착을 위해 운영하는 제도 중에 ‘멘토링’ 제도가 있어요. 중학생 때 고등학교 형 누나들이 공부도 가르쳐주고, 롯데월드 같은 재미난 곳도 데려가줬죠. 어느 날 제 멘토 형이 롯데월드에 가자고, 지하철 역 앞에서 보자고 해서 나갔어요. 그렇게 개찰구 앞으로 갔는데, 형이 표를 사자고 하는 거예요. 돈을 주고 표를 사야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거였죠. 하지만 전 한 푼도 챙겨가지 않았어요. 그런 개념 자체가 제 머릿속엔 없었거든요. 그 때 그 형의 난감해하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결국 형이 교통비며, 입장료까지 전부 내줬어요. 밥도 사줬죠. 그때 느꼈어요. 뭔가를 그냥 받는다는 게 부끄럽고 민망하다는 걸요.”

김 씨는 탈북민 정착을 위해 나라에서 받는 모든 지원과 혜택 역시 공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 세금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그만큼 언젠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너무나 절실하게 느낀다.

사업을 하며 월급을 주는 입장이 된 김 씨는 늘 직원들에게 똑같이 월급을 준다. ‘성과급’에 대한 개념이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왜 업무 강도를 따져서 월급을 차등해 줘야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똑같이 주고, 그만큼 똑같이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내가 받을 것만 생각하면 되는데, 자꾸 남과 비교하는 동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자신의 생각이 원래 자신의 성향인지 아니면 탈북민이라 갖게 되는 특성인지 스스로도 혼란스럽다.

“사회주의권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변인들의 말을 들을 때가 있어요. 저도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원래 제 성향이 이런 건지, 아니면 정말 탈북민의 특성인건지 혼란스럽죠. 그래서 전 저를 탈북민이 아니라, 개인으로만 바라봐주길 바라요. 정치, 이념 같은 것과 상관없이 그냥 저 개인으로요. 그게 탈북민이어서 생긴 가치관이든, 아니면 원래 제 성향이든 어쨌든 그게 저인 거잖아요.”

평양이 북한의 전부가 아니다 

김 씨는 통일이 된다면, 남북 간 이질적인 요소를 없애는 중재자가 되고 싶다. 남북을 모두 겪은 자신은 양쪽 모두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 씨는 남북의 거리를 좁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북한에선 접하기 힘든, 그러나 남한에선 너무나 발달되어 있는 IT기술을 가르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건 서로를 미리 아는 것이다. 유튜브에 떠도는 북한 관련 영상들 중 북한을 정확히 담고 있는 건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오해도 많고, 남북이 계속 멀어지는 느낌만 든다.

“사실 남한에서 바라보는 북한은 ‘평양’이 전부인 거 같아요. 하지만 평양은 정말 일부거든요. 진짜 북한을 알기 위해선 평양이 아닌, 다른 지역을 들여다봐야 해요. 제가 살았던 남포만 해도 평양과는 다른 세상이었죠. 제대로 된 진짜 북한의 실상을 아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김 씨는 최근 홈페이지 하나를 만들었다. ‘노스 스페이스’라는 이름의 사이트에는 앞으로 평양이 아닌, 북한의 다른 지역들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꾸준히 올릴 예정이다. 이를 통해 평양 사람이 아닌, 일반 북한 사람들이 입는 옷, 먹는 음식, 생활 모습을 공유하고 싶다.

“제가 생각해왔던 통일을 위한 방법 중 하나를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진짜 북한을 제대로 알리는 거죠. 사진 한 컷, 한 컷이 주는 이미지는 엄청난 힘을 갖겠죠. 좋은 사진기도 사서 북한에 보내주고 하려면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할 것 같아요. 하하하.”

강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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