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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남성 심벌’이 왜 신라왕실 연못에? <발굴왕>
2019-10-10 11:15 사회

※김상운 기자가 진행하는 대한민국 최초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서 흥미로운 고고학 이야기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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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 귀두 부위에 튀어나온 돌기가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선생님, 방금 이런 게 나왔는데 뭔지 아시겠어요?”
“음, 모양이 딱 그건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1975년 5월 29일 월지(月池·안압지라고도 불림) 북쪽 기슭 발굴현장. 한 여성 조사원이 바닥 개흙 층에서 발견한 17.5cm 길이의 기다란 나무 조각을 한 남성 조사원에게 내밀었습니다. 조각을 뒤덮은 진흙을 닦아낸 남성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챘지만 대답을 머뭇거렸지요. 남녀유별이 아직 유난했던 1970년대에는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것은 전형적인 남성의 심벌 모양.

왕궁 연못에서 느닷없이 남근상(男根像)이라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 이쪽으로 쏠렸습니다.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의 회고.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들이 발굴현장에 와서 목제(木製) 남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다보니 최태환 작업반장이 남근에 실을 살짝 묶어놓았어요. 약품 보존처리 중이던 목제 유물들에 둘러싸인 남근을 손쉽게 찾으려고 한 거죠.”

경주 동궁 발굴현장에서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가운데)이 후배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윤 전 소장은 1975∼76년 월지 발굴에 참여했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남근상의 용도는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학계에서는 예부터 바닷가 해신당(海神堂)에서 남근을 세워놓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제의용이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됐죠. 이와 관련해 고대 로마 폼페이 유적에서도 도시 곳곳에서 남근 조각과 그림들이 발견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월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데다 귀두 부위에 돌기까지 붙어 있어 여성의 자위기구라는 설도 제기됩니다. 이와 관련해 만들다가 중간에 버려진 불량품 형태의 남근상 2점도 발견됐습니다. 윤 소장은 “남근상의 길이가 실제 발기됐을 때의 그것과 비슷하고 표면을 정성스레 다듬은 점도 예사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경주 동궁과 월지 전경. 문화재청 제공

신라시대 무한(無限)의 정원
사실 남근상이 출토된 월지는 경복궁 경회루처럼 통일신라시대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연회를 베풀던 격식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둘레가 1005m, 면적은 1만5658m²에 이르는 거대한 연못이지요. 윤 소장은 월지에 대해 “여긴 사방 어디서도 전체를 볼 수 없는 무한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천년왕성 월성(月城) 동문 터와 맞보고 있는 월지 남쪽에 들어서면, 연못을 중심으로 복원된 건물들과 인공섬 대도(大島), 소도(小島)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월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지점이죠. 그러나 연못의 북서쪽 방면에 자리 잡은 중도(中島) 일대는 이쪽에선 볼 수가 없습니다.

40여 년 전 윤 소장과 함께 월지를 발굴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안압지 발굴조사와 복원’ 글에서 “월지는 무한한 바다를 좁은 공간에 표현했다”고 썼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월지에 대해 “서기 674년(문무왕 14년)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삼국통일 직후 왕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문무왕이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월지에 집약한 게 아닐까요. 나중에 그가 바다 속 수중왕릉에 묻힌 사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김상운 동아일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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