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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도 “원샷” 있었다?…월지 주사위로 본 신라인의 음주 풍습 <발굴왕>
2019-10-17 12:03 문화

※김상운 기자가 진행하는 대한민국 최초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서 흥미로운 고고학 이야기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nWqng3MswATmWIBUDTWdBg

 

1975년 4월 16일 경주 월지 발굴현장에서 인부들이 통일신라시대 나무배를 끌어올리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대한민국 최초의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 5회는 '월지 출토 남근상(4회)'에 이어 이곳을 발굴한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님을 모시고 월지 발굴에 얽힌 재밌는 뒷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5회 촬영 땐 주령구를 굴려보고 쓰여 있는 벌칙대로 음주(?)를 체험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삼국시대 배 최초 발견

둘레 1005m, 면적 1만5658m²에 이르는 월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유람선을 띄우는 것도 방법일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1975년 4월 16일 연못 한가운데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배 한 척이 발견됐지요. 길이 6.2m, 너비 1.1m로, 3개의 판목을 세로로 결구시킨 형태였습니다. 이것은 그때까지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선박이었죠.
문제는 엎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나무배를 안전하게 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부식이 쉽게 일어나는 유기물 특성상 1300년 묵은 나무는 스펀지처럼 취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1960~90년대 경주 발굴현장을 지킨 백전노장 고(故) 김기출 작업반장과 상의한 끝에 나무배 아래로 나무장대 여러 개를 수직으로 교차시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고선 고무줄로 단단히 묶은 뒤 마치 상여를 메듯 들어올렸습니다. 인부 30명이 달라붙어 경사로에서 나무배를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균형이 맞지 않아 살짝 금이 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일부 언론이 이를 과장해 신라시대 나무배가 두 동강이 났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지요. 현장을 지휘한 김동현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지만, 나무배가 거의 완형을 유지한 채 수습됐기 때문에 반려됐습니다. 발굴팀은 나무배를 약품에 담가 7년 동안 보존처리를 진행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월지 출토 나무배.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진땀 뺀 나무배 보존처리
열악한 환경에서 1970년대 목재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도 쉽지 않았습니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조종수 한양대 교수의 조언에 따라 발굴단은 나무배를 꺼낸 직후 페놀을 묻힌 탈지면을 배 위에 덮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유물 출토에 계획에 없던 보존처리 시설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발굴단은 황룡사지 발굴현장에 철판으로 PEG(보존처리약품)가 담긴 탱크를 만든 뒤 나무배를 통째로 여기에 담가놓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액체를 머금은 나무배의 부피가 팽창하면서 철판이 부풀어 오르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죠. 윤 소장은 급한 대로 탱크 주위에 나무판을 대고 철사로 단단히 묶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당시 발굴단은 발굴 틈틈이 PEG 약품을 한 달에 한번씩 교체하는 작업까지 벌였습니다. 이후 나무배는 서울로 운송돼 일본에서 목재 보존처리를 배운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병호 박사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나무배 이외에 1, 3, 5호 건물터 앞에서는 금동 판불(板佛)과 토제 화덕, 각종 생활도구 등 각종 유물들이 출토됐습니다. 이 중 판불은 1호 건물터 앞에서 1점이, 인공섬인 대도 부근에서 9점이 나왔다. 판불이 발견된 양상을 볼 때 월지 주변에 불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5호 건물터 앞에는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석축이 발견돼 나무배를 타고 내리는 선착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밖에 월지 서안 건물터 주변에서 목간(木簡) 58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1975년 월지에서 발견된 14면체 주사위 복제품.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운치 넘친 신라인들의 음주
  월지 출토 유물 중에서는 무엇보다 신라시대 나무 주사위인 주령구(酒令具)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벌주(罰酒) 등 술자리에서 벌칙들이 적혀있어 주령구라고 불립니다.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에는 지금의 ‘원샷’과 흡사한 ‘飮盡大笑(음진대소․술잔을 비우고 크게 웃기)’ 등 재밌는 문구들이 각 면에 새겨져 있죠. 신라인들의 음주 풍습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이와 관련해 2008년 동궁 내 우물터 발굴조사에서 상아로 만든 정육면체 모양의 주사위가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30여 년 만에 또 하나의 신라시대 주사위가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주령구는 14면체로 각 면에 글자가 적혀있지만, 이것은 현대의 주사위처럼 1~6개의 구멍이 나있습니다.

월지에서 발견된 보상화무늬 벽돌.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월지 발굴 해프닝
월지 발굴조사에서는 발굴부터 유물 보존처리까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전해 내려옵니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양수기로 월지의 물을 빼낼 때 붕어가 잡힌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발굴단장 김정기 박사는 유독 회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를 잘 아는 윤 전 소장이 눈치껏 붕어를 회로 쳐서 소주와 함께 상을 차렸습니다. 이들은 함께 붕어회를 먹은 뒤 민물고기에 즐겨 서식하는 간디스토마에 감염돼 한동안 고생했다고 합니다.
월지 북서쪽 호안 석축에서 출토된 주령구를 서울로 가져가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대형사고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보존과학실 담당자가 건조기에 주사위를 말리려다 그만 태워버리고 만 것이죠. 지방지 주재기자가 이를 보도해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고 합니다. 결국 발굴단은 출토 직후 촬영한 유물 사진과 연필로 뜬 탁본을 바탕으로 복제품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월지 출토 주사위는 바로 이겁니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윤 소장은 1975년 월지 발굴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발굴단을 치하한 뒤 거액의 금일봉을 전달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현직 대통령이 발굴현장을 직접 둘러보는 예는 극히 드뭅니다. 금일봉 액수도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고 하네요. 당시 돈으로 약 200만 원이었는데, 100평짜리 고급주택이 100만 원에 미치지 못했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큰 돈이었습니다.

김상운 동아일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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