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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어떻게 시작됐나?…故 김학순 할머니 최초 증언
2020-06-02 14:26 사회

■ 방송 : 채널A 뉴스A 라이브 (13:50~15:20)
■ 방송일 : 2020년 6월 2일 (화요일)
■ 진행 : 송찬욱 앵커, 김민지 앵커
■ 출연 : 임도현 뉴스A 부장

[송찬욱 앵커]
수요집회가 1,500회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장기 집회. 하지만 잇따르는 정의기억연대 의혹으로 수요집회는 갈 길을 잃었습니다. 수요집회의 미래, 어떻게 될까요.

[김민지 앵커]
2011년 12월이었습니다.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던 날, 현장을 취재했던 임도현 뉴스A 부장과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송찬욱]
임 부장, 1,000번째 수요집회가 이제 한 8년 6개월 전이었네요.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임도현 뉴스A 부장]
그 당시가 채널A 개국과 비슷한 시기였고요. 수요집회가 마침 20년 정도 지났고 1,000번째 집회였기 때문에 그 상황을 다큐 프로그램으로 취재했습니다. 그때 전국에서 시민들 수천 명이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정치인이나 유명인들도 상당히 많이 왔습니다. 같은 시간에 일본에서도 집회가 열렸고 해외에서도 상당히 많은 관심이 있었고요. 소녀상이 바로 저 날 일본대사관에 처음 설치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때만 해도 일본의 책임 인정과 사과가 곧 이뤄지지 않겠냐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김민지]
영상을 살펴보니까 저때 수요집회에는 할머니들도 굉장히 활발하게 적극참여하셨는데요. 1,500회나 맞은 수요집회,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임도현]
그 전에 말씀드릴 것이, 그 당시에는 할머니들의 참여가 상당히 활발했고요. 수요집회 직전에 일본 총리가 방한해서 두 나라의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그때 광화문 길목에서 다시 한 번 수요집회가 열렸는데요. 그때만 해도 할머니들과 윤미향 대표가 직접 광화문 길목에 나서서 규탄 집회도 했었거든요. 수요집회는 1991년 여름에 故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 자신이 바로 위안부라고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하면서 알려졌습니다. 그 다음해 92년 1월 8일에 역사적인 1회 집회가 열립니다.

[송찬욱]
2011년 1,000회 집회를 취재했을 당시 당연히 윤미향 의원, 당시 정대협 대표를 직접 만났을 텐데요. 수요집회에 대해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던가요?

[임도현]
그때는 상당히 활동이 활발했고요. 할머니들과 함께 매주 한 번씩 거리로 나갔었는데. 이 수요집회에 대해서 상당히 의지를 보였습니다. 지금 일부 할머니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보면 저때부터 약간의 의혹이나 회계 문제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제는 유족회 차원에서 규탄집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윤정옥 교수가 물러난 뒤에는 할머니들이 윤미향 대표를 조금 무서워했다는 증언까지 나오고 있는 거죠.

[김민지]
사실 정대협 활동을 시작할 때 생존 피해자가 한 240분 정도 계셨는데요. 지금은 불과 17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수요집회의 모습도 현재는 많이 위축된 상황인데요. 과연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임도현]
아예 수요집회를 중단하자, 정의연을 해체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거든요. 지난주 열린 수요집회가 1,441회였습니다. 내년 여름이면 1,500회가 되는데요. 사실 지난 30년간 일본을 상대로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공론화시키고 이 문제가 UN까지 간 것도 수요집회와 정대협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없앨 것이 아니라 이참에 문제를 해결하고 더 발전시켜나가자는 목소리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려면 과제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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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텍스트는 실제 토크 내용의 일부분입니다. 전체 토크 내용은 동영상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정리=호현지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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