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쇼 A타임/테마인터뷰]학림사건 무죄판결…31년 만에 누명 벗은 이태복 前 장관

2012-06-19 00:00   정치,정치,사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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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천> 1980년대의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학림사건이, 31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학림사건 피해자 전원이 무죄로 판결이 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하> 이 시간에는 오랜 누명을 벗은 당사자인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모셔서, 이번 판결의 의미와 자세한 사건의 정황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포트]
하> 이번에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으면서 31년 만에 누명을 확실히 벗으셨는데, 무죄 판결 소식을 들으셨을 때 기분 어떠셨나요?

이태복(이하 이)> 우선 기쁘고요, 그런데 2010년도 12월 말에 재심 법원인 서울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났습니다. 그때, 재심법원의 안형진 부장판사가 저희들한테 오랫동안 고통받게 한점에 대해서 사법부를 대신해서 ‘정말 죄송스럽다’라는 사과가 있었어요. 그래서 대법 판결은 당연히 무죄판결이 올꺼 기대를 했지만, 이것도 너무 시간이 걸렸어요. 1년반이 지났으니까.

천> ‘학림사건’ 저는 초등학교 다닐때라 잘 기억이 없습니다. 많은분들이 또 기억하시겠지만 또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학림사건’이 어떤사건이였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십시오.

이>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고나서 첫 번째 대형 시국 사건이였습니다.

천> 첫 번째였습니까?

이> 첫 번째 사건인데, 전두환 정권이 광주에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한 3~4년은 조용할줄 알았던가봐요. 근데 경찰에서도 유인물이 계속 나왔고, 계엄 해지되면서 전국적인 대학가 시위가 이어졌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여러 문제에 대한 심각한 상황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생연맹에 학생들은 전부 그 당시 대학생들이였고, 노동자연맹은 학생운동했던 분들이나 노조 간부들이였어요. 그런데 노동자연맹이라 하는곳은
‘최저임금제’, 요새 다 하지요. 8시간 노동제, 노동상권의 보장 이런거를 목표로 하는거였고, 학생연맹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폭로하고 그리고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 조직이였습니다. 이것을 공안 사건으로 몰아서 방과 단체로 기소하고 저를 수배로 기소했던것이지요.

천> 당시에 학생이셨나요?

이> 저는 그때 출판사의 대표를 하고있었어요. 후배들이 주로 직접적으로 학생연맹의 핵심 간부들이였기 때문에 학생들로 하기에는 방과 단체가 미흡하고, 선배급이고 사회활동하는 저를 붙여놓은것이지요.

천> 이름이 ‘학림’이라고 붙은 것은 학림다방에서 만나서?

이> 그렇다고 보도가 많던데, 사실 아니고요. 그때 수사기관이 학생운동에 두개 흐름이 있었어요. 한 흐름이 적극적으로 싸우지말자고 하는 나중에 장기투쟁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들 사건을 무림이라 했고. 보다 적극적인 전국적 학생 조직이 있었던 이 조직을 학림이라고 한거지요.

천>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던거네요?

이> 그렇죠, 그당시 상황에서는 두가지 입장가운데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광주학살의 진상을 표명하고, 군사정권의 퇴신투쟁을 해야한다. 물론 그때도 아주 엄혹했어요. 살벌하고, 우리도 좀 쉬었다가 숨어서 분위기가 좀 나아지면 하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지요. 근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요. 노동자 연맹의 중앙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광주항쟁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도청에서. 윤상훈 동지라고. 그분이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멤버 입장에서 전두환 군사정권에 집권을 방관할수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싸움을 하게 된겁니다.

하> 이번에 같이 누명을 벗게된 민주통합당 민병두 의원이라든지 아니면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그리고 최규엽 새세상연구소장 같은분들과는 아직까지 연락을 하고 계십니까?

이> 예. 제 후배들은 대게 1~2년 살고 나가서 또 한번 대게 징역을 살았습니다. 저는 줄곧 감옥에 있었고. 워낙 어려운 시절에 같이 고생을 해서 지금도 끈끈하지요.

하> 이번 무죄판결을 두고서 다들 어떤 말을 하던가요?

이> 만시지탄인데, 사필귀정이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사회정의를 바로 확립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참 다행스럽다. 이게 일반적인 소감들이였습니다.

천> 당시에 억울하게 기소되고, 또 옥살이를 오랫동안 하셨고. 몇 년하셨던거죠?

이> 저는 7년4개월 했습니다. 0.9평 1.65평에서 독방에서 혼자 살았어요.

천> 독방에서 7년여를 사신거에요?

이> 그렇습니다.,

천> 기소단계에서는 상당한 고문을 받으시면서 억울하게 거짓도 증언하시고 하셨다는데, 그때 고문했던 분이 이근안경감이셨다고.

이> 네 그때는 경위죠.

천> 그때 기억하시기는 싫으시겠지만, 굉장히 저희는 말로만 들어서 압니다만. 심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이> 그당시 고문이라고 하는게 인간으로서 살수 없는 그런 온갖 일들이 다 벌어진거죠. 잡혀서 들어가면 대게 무조건 매타작이라고 그래서 머리, 다리 인정사정 없이 두드려 패죠. 그리고나서 옷을 다 벗깁니다. 발가벗깁니다. 그리고서 이제 시체를 묶어놓은다는 시청판에 묶어놓지요. 그래서 이제 그걸 들어서 발을들면 머리가 욕조에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남양동에 가면 그 시설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들어서 물을 먹이고 물고문 시작하는거지요. 물만 먹이는게 아니라 나중에는 다시 올려놓고 입에다가 수건 넣고 거기다가 물을 계속 붓죠. 그러면 이게 천천히 스며들면서 아무리 거부해도 물을 안먹을수가 없게되죠. 숨이 막히고, 그럼 졸도하고. 그럼 다시 물부어서 깨우고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두가지 목적입니다. 하나는 니가 공산주의자라는걸 무조건 인정하라는 거고 니가 수괴라는걸 무조건 인정하라는 거죠. 근데 수괴를 인정하면 뭐냐하면 사형아니면 무기에요. 국가보안법상. 그리고 이거는 방과단체를 만들겠다는 속셈이 처음부터 있었던거죠. 그래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저는 부끄럽지만 세 번에 걸친 항복을 하였어요. 1차 항복, 2차항복, 3차 항복. 두달동안 있었으니까. 또 그때는 인권이랄지 고문에 관한 사회적 여론이 있었던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두달동안 맘껏. 그리고나서 전기고문하고 또 계속 관절꺾기 하고. 온갖 일들이 벌어졌던거죠. 저도 몸이 완전히 반쪽이 되었어요.

하> 사실 고문 담당이였던 이근안씨와 담당 검사 이러분들이 심하게 고문을 했기 때문에 용서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화해를 했다 이런 얘기가 들리더라구요.

이> 저는 화해와 용서를 한 상태입니다. 제가 사형구형을 받고 나서 워낙 분위기가 엄혹했던 시기라서 변호사님들이 이동영 변호사, 황인철 변호사님이 제 담당 변호사님이셨는데. 오셔가지고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니까 당신들은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는데 시범케이스로 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야된다. 참 어려운 얘기라면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전격적으로 엄도하고 집행할수 있다. 그러니까 준비를 해라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제가 그러니까 그냥 넘어갈수 없었어요. 이걸 그대로 원한과 증오로 안고갈지 아니면 털고 가야할건지.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나도 용서하겠는데. 만날 기회가 없잖아요. 그래서 밤에 정말 잠도 못자고. 사형구형 받으면 포승으로 벽에도 묶고 수갑도 채우고 누워도 포승줄이 파고 들어와요. 옆으로 누워도 파고들어와 잠을 잘수가 없죠. 그런데 새벽에 은교동 언덕에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데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니까 ‘아카시아 나무가 봄에는 어땠을까’하니까 파란 아카시아잎이 붙더라구요. 여름에는 아카시아 꽃잎이 피지 이러니까 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펴. 겨울에는 이렇게 생각하니까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된다. 그때 내가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사람들이 나에게 사과하면 용서하라는게 아니라 용서와 화해는 무조건적이라는 뜻이구나. 나한테 찾아오면 용서하겠다 이런 뜻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구나. 내가 용서하고 화해하자. 이렇게 탁 털었어요. 그리고나니까 그날밤에 잠을 잘 잤어요. 그때, 우리 소년수들이 있었는데 소년수들이 사형수들이야. 걔들이 와가지고 어제밤에 무슨 좋은일 있었냐고 그러면서 그래. 어젯밤 좋은 일 있었다고. 그뒤로 나는 징역생활을 편안하게 했어요. 마음이 편하니까.

천> 혜민스님의 책을 보니까 남을 위해서 용서하는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라는 구절이 있던데 그말이 참.

이> 그말이 맞는 말씀이죠.

천> 지금 당시 학림사건의 판사였던 황우여 새누리당 당대표가 이제 판사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학림사건이 무죄판결이 났기 때문에 사과를 해야된다고 민병두 의원이 말씀하시던데. 여기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십니까?

이> 저는 이제 좌배석 판사가 황우여 판사고 우배석 판사가 이강국 현재 헌재 소장입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최종영 먼저 대법원장을 시킨분이에요. 저는 이미 화해와 용서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분들에게 특별히 따로 원한이나 증오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지금 사회 지도층이거든요. 우리사회가 좀 더 화합하고 단결하려면 굉장히 우리사회 어지럽고 분열히 심하잖아요. 많은 분열의 원인과 조건가운데는 지도층의 잘못된 처신도 큰 역할도 한거거든요. 그런점에서 본다면 그분들이 과거일에 대해서 ‘내가 그때 일어난상황에 대해서 어쩔수 없이 이렇게 됐었다’ 그러한 사과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또 그분들이 사과한다면 언제든지 사과의 악수를 내밀수 있어요. 또 기다리고 있고. 그분들이 정치를 하신다면 그렇게 하는게 원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래야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좀 추슬러서 단결하고 서로 용서할수 있는 그런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 사실 얼마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육사 생도들에게 사열을 받아 큰 논란이 일었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 저는 참 뻔뻔스럽다고 생각해요.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내신분이. 사회 상식이라는게 있거든요. 돈을 29만원밖에 없어서 돈을 못내겠다고 얘기 하신분이 어떻게 또 헌금도 하시고, 손녀의 결혼식도 하시고. 군대 가가지고. 육사도 군대거든요. 그런데 가서 사열까지 받고. 이거는 육사교정도 문제고 국방부 장관도 문제지만 당사자가 문제인거지요. 그리고 그걸 용인하는 사회도 문제고요. 저는 그런점에서 한국사회가 아직도 특히 지도층의 양식이 정말 멀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천> 또 하나 요즘 정치권에서 불고있는 색깔론, 정북논쟁 이런것들이 있는데요. 당시에 그런 학림사건에 이끄시면서 적극적으로 활동 하셨다고 하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NL, PD 이렇게 따진다면 굳이 비교하자면 NL쪽에 가까우셨던 활동을 하셨던건데.

이>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민주화 이외에 다른주제가 없었으니까. 군사정권과 어떻게 싸울꺼냐 이거밖에 없었지, NL·PD 이런부분은 없었어요.

천> 그럼 만약에 지금 일고있는 종북논란,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사퇴공방 이런거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이후의 학생운동이 잘못된길을 가게되면서 국민들로부터 고립이 되고 비판받는. 그래서 우리들의 민주화 운동이 이상해져버린 이러한 결과가 된 현실에 대해서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 국회의원들은 헌법기간입니다. 대한민국의 헌법기간이라는거지요. 그런점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해서 각 개인의 사상과 이런부분을 국가가 통제하고 억제할 수는 없는거지요. 그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자유니까요. 그러나 헌법기간으로 역할을 할려면 대한민국 정체성에 맞는 태도를 분명히 하는게 그들에게도 그 당에게도 도움이 되는걸꺼입니다. 만약 그것을 계속 늦춰서 논란이 불거질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오지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 DJ 정부시절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셨고, 2010년 6.2 지방선거때는 충남지사에 출사표를 던지시기도 하셨는데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 그때는 그 당에서 저한테 영입제안이 와서 그래서 일자리 문제나 저출산 문제 이런게 시급한 현안 문제입니다. 또 복지문제도 그렇고요. 근데 그런것들은 도지사로서 할수 있는역할이 있다고 일정하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준비작업을 했던것인데, 그당의 고위지도층에서 정치헌금을 요구해서 그래서 제가 못하겠다고 얘기하고 그만두었지요. 근데 저는 우리사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요. 여러 당론을 둘러싼 대립도 있고, 근데 제가 청와대 수석도 하고 장관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정부의 재정이 지금 310조 가량 되지 않습니까, 이 재정가운데 낭비되는게 너무나 많습니다. 낭비되는 부분을 빨리 정리해야되요. 그래서 그 예산을 가지고, 지금 노인자살률 세계최고죠, 저출산도 최고죠. 이런 부분의 문제는 사실 20%정도가 제가 보기에는 불필요한 부분에 낭비되고 있다고 보고있는데. 그러면 한 5~60조 정도 됩니다. 그예산들을 제대로 정비하면 사실은 사회적 안전망도 튼튼히 만들고 실업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생생내기식 임시 일자리가 아니라 중소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거기서 실질적인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게 너무나 많다는 거지요. 하나만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중소기업 부품소재 분야에 수입이 얼마냐 하면 2천8백억 달러 정도 합니다. 280조 가량을 수입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술력차가 보통은 2~3년 나지요. 그거는 정부가 적절한 투입을 한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는 일이고, 일자리가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돈이 들어가는건 내수시장을 살리는 거지요. 그러면 자영업을 포함해서 매일 문닫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살길이 열리고 내수가 활성화 되는거지요. 그럼 실업부분에 투입되는 예산을 줄일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적으로 실업자가 나오고 그들의 안전망을 깔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계속적으로 투입해야될꺼거든요. 이 많이 할꺼냐 안할꺼냐 싸우는거는 저는 넌센스라고 봐요. 보다 근본적 대책을 세워내면 얼마든지 일자리도 만들고 중소기업도 살리고 내수도 살릴수 있는 완전 트리플 방식의 처리가 얼마든지 가능한데 겉도는 싸움만 계속 하고있는 것 같아요. 제가보기에는. 참 안타까운일이죠.

천> 네 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1980년대 대표적인 공안사건중에 하나였던 학림사건에서 31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아내신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모셔서 학림사건에 관해서 자세히 얘기 나누어 보았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