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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자갈돌이 바둑돌?…실제 대국해보니
2022-04-28 16:08 문화

-5세기 무덤에서 발굴된 자갈돌로 대국
-"실제 바둑돌로 사용됐을 가능성"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바둑돌 모양의 자갈돌로 바둑 기사들이 대국을 펼치는 모습. 사진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경북 경주의 신라 고분인 쪽샘 44호분에서 출토된 바둑돌 모양의 자갈돌로 아마추어 바둑 기사들이 대국을 벌였습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8일 여성 기사인 김수영 아마 7단과 홍슬기 아마 6단이 쪽샘(유물 출토 지역의 옛 이름) 고분 발굴 조사 현장에 마련된 특별 무대에서 자갈돌로 바둑을 두는 모습을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삼국시대인 5세기에 만들어진 쪽샘 44호분은 지름 30m의 대형 봉분을 갖춘 돌무지덧널무덤(나무로 짠 곽 주변에 돌을 쌓고 봉분을 덮은 신라 특유의 무덤)입니다.

신라 왕족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는 금동관,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무덤 주인의 발 아래쪽에서 860여 점의 바둑돌 모양의 자갈돌이 출토됐습니다.

 바둑돌로 추정되는 자갈돌의 출토 위치 사진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학계에서는 4세기에 바둑이 중국에서 승려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첩자' 도림 스님을 백제에 보내 왕과 바둑을 두게 했다는 겁니다. 쪽샘 44호분은 삼국사기에 바둑이 언급된 시기와 비슷한 5세기 후반의 고분입니다.

출토된 자갈돌은 지름 1∼2cm, 두께 0.5cm 내외의 작은 돌로, 가공한 흔적이 없어 자연석을 그대로 채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유리 혹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는 현재의 바둑돌처럼 흑백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실제 대국에 사용된 바둑돌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바둑판이 함께 출토됐다면 자갈돌이 바둑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한결 수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둑판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고분에서 출토된 흑백의 자갈돌들 사진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살펴보면 당시 바둑판은 나무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면서 “바둑판을 무덤에 넣었더라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부식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국은 출토된 자갈돌을 사용해 대국이 가능한지를 실험하기 위해 기획됐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현대 바둑에 필요한 돌이 361점이라는 점을 고려해 출토된 자갈돌 중 흑색과 백색이 상대적으로 뚜렷한 200점씩을 구분해 대국에 사용했습니다.

30분가량의 대국을 마친 바둑 기사들은 색깔 구분에 대한 어려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흑으로 대국한 김수영 아마 7단은 “잠시나마 신라 공주가 되어 바둑을 두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바둑을 뒀을 때 크게 문제가 없었고 흑백 분간이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백으로 대국을 한 홍슬기 아마 6단은 “현대 바둑알에 익숙해져 있어서 약간의 어색함은 있었지만, 바둑을 두는 데는 불편함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실험이 자갈돌이 실제 바둑에 사용됐을 가능성을 높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연구소 관계자는 “자갈돌을 바둑돌로 사용했을 때 대국 진행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후속 연구를 진행한 뒤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발굴조사보고서에 담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문화계 일각에서는 이번 대국을 앞두고 일반인 바둑 기사가 유물을 만져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이에 대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대국에 앞서 유물 훼손과 분실 가능성에 대비해 보존처리 작업과 유물 목록화 작업을 완료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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