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들은 어린 시절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어려움들을 겪었고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오늘은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 대선후보가 어린 시절부터 정치 입문할 때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소년공→법대생→변호사… 이재명의 성장과정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경북 안동시의 화전민 마을인 지통마을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이 후보가 안동에 애정이 많아서 자주 내려가고, 일부 유림이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죠.
대학 중퇴로 그때만 해도 고학력이었던 아버지는, 교사와 경찰로 일한 적도 있다는데 노름에 빠져서 재산을 다 탕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후보는 어린 시절 참 힘들게 자랐습니다. 크레파스나 도화지 같은 준비물을 학교에 챙겨간 적이 없었고, 집에서 학교까지 5km 산길을 걸어 다녀야 해서 결석하기 일쑤였다는데요.
이재명 후보는 자신의 국민학교 성적표 활동 사항에 ‘동무들과 사귐이 좋고 매사 의욕이 있으나 덤비는 성질이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는데요. “선생님에게 따귀를 27대 맞은 적이 있다. 맞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맞으면서도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이 맞았을 것”이라며 일화를 밝혔습니다.
안동에서 삼계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가족과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오는데요. 이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성남 상대원동 꼭대기 지하 월세방에 살았는데요. 아버지는 동네 쓰레기를 치웠고 어머니는 상대원시장 화장실 입구에서 소변은 얼마, 대변은 얼마 이렇게 해서 치워주는 걸로 돈을 벌었다고 하죠. 그리고 다섯째 이재명은 중학교에 다니지 않고, 6년간 소년공으로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당시 공장 선배들이 아이스크림 ‘브라보콘’ 내기로 신참들에게 권투 경기를 시켰다고 하죠. 이 후보는 “일당 600원을 받던 시절 브라보콘이 100원가량 했는데, 권투 내기로 많이 맞고 돈을 뜯겼다”고 회상했습니다.
스키 장갑과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왼쪽 손목이 프레스기에 눌리는사고를 당했죠. 이 사고 후유증으로 왼팔이 굽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 소년공 이재명은 공장에서 맞지 않고, 돈 뜯기지 않고, 점심시간에 자유롭게 공장 밖을 다닐 수 있는 고졸 출신 대리처럼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중등검정고시에 합격하고요. 1년 반 만에 고등검정고시에 합격합니다. 그러니까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는데도 이렇게 쭉쭉 붙어요. 대입 학원 야간반을 다녔는데 6개월 만에 전국 상위 0.2%까지 성적이 오릅니다. 머리가 좋았던 거죠.
이게 이제 입시 수험표예요. ‘수험번호 445964, 성명 이재명.’ 대학 입학시험을 봐서 중앙대 법대에 3년 치 학비를 받는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재맹아, 내는 인자 죽어도 한이 없대이”라고 말한 어머니와 1982년도 법학과 입학식 때 사진을 찍은 이재명 후보. 이렇게 중앙대 법대에 입학하면서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팔에 장애가 생긴 대학생 이재명은, 일반 회사에 취직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접고 사법고시 공부에 매진합니다. 이 후보는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시위 가자는 친구들 권유도 마다하고 공부를 했다”고 밝혔는데요. 그렇게 공부해 1986년 졸업하고, 같은 해 겨울 사법고시에 최종 합격합니다.
이재명 후보의 인생관이 바뀐 결정적 계기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고 해요. 공장을 다니던 시절 ‘폭도가 장악한 광주’라는 내용의 뉴스를 보고 동료들과 함께 광주 시민을 싸잡아 욕했는데, 대학생 때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정부가 총검으로 탄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이 후보는 “광주를 욕했던 자신을 크게 탓했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말합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민주화 관련 활동을 시작한 건데요. 개혁적 성향의 동료들과 학회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법연수원 동기는 문무일 전 검찰총장,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정성호 민주당 의원이 있습니다.
사법연수생 이재명은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습을 합니다. 성남지원에서 판사 시보, 안동지청에서 검사 시보도 거쳤는데요. 사법연수원 성적이 중상위권이라 판검사로도 갈 수 있었지만, 인권변호사를 선택합니다. 사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갈 때 고민도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인데요. 생계를 꾸릴 수 있을지 걱정을 하던 때, 부산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 한마디,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를 기다려온 어머니에겐 “성적이 안 돼서 판검사 임용이 힘들다”고 핑계를 댔다고 해요. 이재명 후보는 1989년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인권변호사 활동을 합니다. 성남공단의 노동 관련 사건과 외국인 노동자 산업재해 사건, 구속된 대학생들 변호는 물론이고, 시국사건 양심수들의 사건도 무료로 맡습니다. 일주일에 2번은 이천노동상담소로 가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법률 상담도 했는데요.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가 불현듯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90년 여름 ‘모솔 탈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셋째 형수의 주선으로 지금의 아내 김혜경 씨를 만났고, 저돌적인 연애 스타일로 밀어붙여 이듬해 3월 결혼식을 올립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뒀죠.
그 후 이재명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1994년에 성남시민모임을 만들어 지역 시민단체 활동을 합니다. 분당 남부저유소 반대와 같은 환경 운동,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과 성남시장 뇌물수수 의혹 제기 등 비리 척결 운동에 매달렸는데요. 그러다가 2004년 그의 인생이 바뀌는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시작하죠.
당시 적자로 인해 성남에 있던 종합병원들이 문을 닫자, 시민들과 시립병원 설립 조례안을 올리는데요. 하지만, 성남시의회에서 이 조례안이 부결되자 점거농성을 벌이다가 수배를 당합니다. 이 일이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되죠. 이재명 후보는 “수배를 피해 숨어 있던 한 교회 지하실에서 선배가 싸 온 도시락을 먹다가 서러움에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현실을 바꾸자, 내가 성남시장이 되어서 내 손으로 바꾸자… 그것이 정치인 이재명의 시작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후 이재명 변호사는 2005년 8월 23일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합니다.
▶보일러공이 된 서울대생? 김문수의 성장과정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경북 영천군 황강동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이재명 후보도 7남매였죠. 동네에서 꽤 잘 살았다고 하는데, 국민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친척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집니다. 김 후보는 당시 읍내에서 판잣집 생활을 하게 됐는데 “열등감에 빠지게 만든 큰 요인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했던 김문수 후보는 1964년 영천군에서 영남 지역 명문학교인 경북중학교에 진학한 세 명 안에 들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문중의 별’로 불렸다는데요. 김 후보는 중학교 시절부터 정의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김 후보와 중·고·대학 동창인 이원덕 전 노무현 정부 사회정책수석은 “김문수는 덩치 큰 친구들이 힘이 약한 친구를 괴롭힐 때 주저하지 않고 책상에서 딱 일어나서 ‘하지 마라’고 나섰다”고 했다고 회상합니다.
명문고인 경북고에 진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합니다. 고3 때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당해 자칫하면 대학에 가지 못 할 뻔했습니다. 대학 입시 직전에 정학이 풀려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요. 그렇게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합니다.
사촌형이 “경영학이 신식 학문”이라고 해서 경영학과를 선택한 김 후보는 곧 운동권으로 들어갑니다. 학교 선배였던 심재권 전 의원으로부터 “대학에 출세나 하려고 왔느냐”란 얘기를 듣고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했습니다. 유신 독재 타도 운동을 하다가, 선배인 고(故)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권유로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구로공단 미싱 공장에 위장취업을 합니다. 이렇게 위장취업 1세대로 노동운동을 시작합니다.
김 후보는 1971년 전국 학생 시위 관련으로 서울대에서 1차 제적을 당하자, 동대문시장 봉제공장 재단보조로 들어갑니다. 1973년 제적이 풀려 학교에 돌아갔다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재차 제적을 당합니다. 김 후보는 결국 노동운동 외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보일러 기술을 배워 열관리기능사 자격증을 딴 뒤, 1976년 보일러공으로 한일 도루코에 입사합니다.
김문수 후보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취득한 열관리기능사 외에도 전기안전기사, 위험물취급기능사, 환경기사 자격증 등 9개의 국가자격증을 갖고 있습니다.
김문수 후보는 한일도루코에서 노조위원장을 맡아 임금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등 노동운동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요.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갑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관련해 서울대 선후배들과 조사를 받다가 기소유예로 49일 만에 풀려났는데요. 이때 서울대 출신인 게 노동계에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고 하죠.
이후 김 후보는 한국노총 금속노조 남서울지역지부에서 청년부장을 맡아 활동 범위를 넓혔고, 그러다가 1980년 5월 비상계엄 뒤 삼청교육대 정화 대상자로 지목되면서 입사 6년 만에 한일도루코에서 해고됩니다.
한국노총 금속노조 활동을 하던 김 후보는 지금의 배우자 설난영 씨를 만납니다. 설 씨는 당시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으로 매주 함께 만나 회의를 했다는데요. 김 후보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란 설난영 씨에 대해 “말투와 문화가 달랐지만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김문수 후보가 도망 다닐 때 설난영 씨가 동생과 살던 자취방에 숨을 수 있게 돕기도 했는데요. 1981년 9월 제대로 드레스도 못 입고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당시 군사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다 보니, 경찰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장 주변에 전투경찰 버스 4대를 보냈다고 합니다. 설난영 씨는 “결혼식장에 하객보다 감시하러 온 전경이 더 많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김문수‧설난영 부부 슬하에 외동딸 동주 씨가 있습니다. 현재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김 후보가 최근 딸에게 쓴 편지를 공개했죠. “동주에게. 네가 한참 아빠를 찾을 나이에 나는 2년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답답한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 나의 유일한 희망은 너와 엄마를 보는 것이었다. 면회를 와서 만날 때면 우리는 서로 서먹하기도 했지. 면회 때 과자 봉지에 들어 있던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건넸는데 25년이 지난 어느 날 네가 그걸 다시 내밀었을 때 가슴이 찡했다.”
김문수 후보는 결혼 후에도 계속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합니다. 1985년도에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했고,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탄생한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지도위원으로도 활동합니다. 이 지도위원을 하면서 인천항쟁에 참여했고, 이 일로 징역 3년을 받아 복역을 합니다.
1986년 5월 3일 인천항쟁은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에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 등 민주화운동 세력이 총집결해 벌인 시위였는데요. 김문수 후보 보좌관을 했던 차명진 전 의원에 따르면 “인천항쟁 집회에서 김문수를 처음 봤는데, 긴 가발을 쓰고 여장을 한 채 집회를 지도했다”고 합니다.
이 시위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도망 다니던 김 후보는 1986년 5월 6일 서울 한 가정집에서 검거됐고, 끌려가서 고문을 당합니다. 고문당하면서도 끝까지 심상정‧박노해의 행적을 불지 않았다고 하죠.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동지로 지내던 시절 김문수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고는 1990년에 정치로 갑니다. 민중당을 만들어 정치를 처음 시작한 김문수 후보. 당시 민중당을 같이 했던 인물이 이재오 전 특임장관이죠. 자신이 서울 구로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총선에도 도전했지만 득표율 미달로 당이 해산됩니다.
그 후 김문수 후보는 1년간 택시기사로 일을 했다고 하는데요. 입학한지 24년 6개월 만에 서울대 졸업장을 받기도 합니다. 제적당하고, 복학했다가 다시 제적당하고, 보일러공으로 회사에 다니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1994년에서야 졸업을 한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 김영삼 대통령을 만납니다. 김문수 후보는 “이제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말을 남기고, 1994년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에 입당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합니다. 한때는 노동운동‧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보수 정당으로 넘어온 거죠. “당신 극우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김문수 후보는 “내 인생 자체가 중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 과학고‧하버드→26세 비대위원… 이준석의 성장과정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살펴보겠습니다. 이 후보는 서울 성동구 사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남 1녀 중 장남입니다. 아래로 여동생이 있죠. 아버지가 증권회사를 다녔고, 유승민 전 의원과 경북고-서울대 동기로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알려져 있죠.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합니다.
이준석 후보는 “돌 무렵 서울 노원구 빌라 반지하로 이사했는데 아버지가 처음 산 집이었다. 당시 딱 중산층이었다”고 합니다. 돌 무렵부터 서울 노원에 터를 잡고 살았고, 아버지가 해외 발령이 나면서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에서 1년씩 살았다고 합니다.
이준석 후보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습니다. 2003년 서울과학고에 진학해 조기 졸업을 하고 카이스트에 진학하는데요. 카이스트 합격 얼마 후 미국 하버드에도 합격해 카이스트를 중퇴하고 하버드로 가서 컴퓨터 과학과 경제학을 전공합니다. 당시 국비 유학생(대통령과학장려금)으로 선발이 돼서 유학생활을 했는데,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기 중에도 매주 20시간씩 컴퓨터 수리 알바를 했다고 하죠.
하버드 재학 당시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학 때 아버지 친구인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후 유승민 전 의원과 바른정당 때도 같이 했고, 지금도 각별하죠.
2007년에 하버드대 졸업하고 귀국한 이준석은 산업기능요원으로 대체 복무를 합니다. 그리고, 정치 입문 계기가 된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봉사단체를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는데요. 어려운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무료 공부방을 만들어 그곳에서 수학 교사로 활동합니다. 2011년에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클라쎄스튜디오’를 창업하는데, 이것도 교육 쪽입니다. 교육 분야, 저소득층 교육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발탁돼 2011년 12월 27일, 스물여섯 살에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는데요. 당시 한나라당은 홍준표 대표가 디도스 공격 사태 등으로 물러나면서, 2선으로 후퇴했던 대선주자 박근혜가 비대위원장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정치 제대로 해서 대통령이 되겠다며 돌아왔을 때, 변화의 시작으로 영입한 사람이 바로 ‘26세 이준석’이었죠. 이준석뿐 아니라 김종인 등을 영입해 그때 한나라당 비대위 구성은 아주 화려했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2011년부터 이준석 후보의 정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됐는데, 26살에 정치무대에 첫 발을 들인 이준석 후보가 40세가 돼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된 겁니다.
이제 60대, 70대, 40대가 된 세 대선후보의 어린 시절부터 정치 입문까지 살펴봤는데요. 어린시절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 하죠. 여러분의 선택에 좋은 참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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