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의 대북 제재를 피해 외화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탈취한 가상자산을 현금화해주는 이른바 '어둠의 은행가'들이 핵심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미국 당국이 이들 중 한 명인 심현섭을 대표 사례로 지목하고 현상금을 700만 달러(약 100억 원대)까지 올리는 등 추적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지시각 25일 미 법무부 기소장과 법원 서류 등을 토대로, 심현섭이 해외에서 김정은 정권의 불법 자금을 세탁하는 임무를 맡아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에 따르면 북한은 위장 신분의 IT 노동자와 해커 조직을 통해 해외에서 수억 달러 규모의 불법 수익을 확보한 뒤, 자금의 북한 연계성을 숨겨 미국 금융 규제를 우회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심현섭 같은 '은행가'들이 등장합니다. 심현섭은 북한 대외무역은행 계열사 대표로 해외에 파견돼 아랍에미리트(UAE)와 쿠웨이트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탈북한 류현우 전 주쿠웨이트 북한대사관 대사대리는 현지에서 심현섭을 여러 차례 만났으며, 당시 심현섭이 브로커를 이용해 가상자산을 달러로 전환한 뒤 위장회사 계좌로 옮겨 인출하는 방식 등을 설명했다고 전해졌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북한 해커들이 탈취한 가상자산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 디지털 지갑을 거친 뒤 '은행가'들에게 모입니다. 이후 심현섭은 미리 접촉해 둔 UAE나 중국 등의 브로커에게 가상자산을 넘겨 현금으로 바꾸고, 브로커들은 이를 위장회사 계좌로 송금하는 방식으로 돈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으로 직접 송금하지 않고 해외에서 물품을 구매해 보내는 방식으로 제재를 우회한 정황도 거론됩니다.
실제 사례로는 2019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헬기를 구매해 북한으로 보내는 데 세탁 자금 30만 달러가 쓰였고, 이 거래가 짐바브웨의 한 로펌을 거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WSJ은 전했습니다. 미 검찰 자료에는 통신 장비 조달과 물자 구매, 심지어 가담배 생산용 원자재 거래에 관여한 정황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미 당국은 심현섭이 움직인 자금이 미국 금융 시스템을 대거 통과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건의 공작에서 시티은행, JP모건, 웰스파고 등 미 주요 은행을 경유한 거래가 310건, 규모는 약 7400만 달러에 달했다는 내용도 법원 서류 등에 담겼습니다. 암호화폐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 자료를 인용해, 북한이 수년간 탈취한 가상자산 가운데 60억 달러 이상이 이 같은 세탁망을 통해 처리됐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심현섭은 유엔 제재(2016년)와 미국 제재(2023년) 대상에 올라 있으며, 2022년 UAE에서 추방된 뒤 중국 단둥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됐지만 체포는 쉽지 않은 상황으로 전해졌습니다. 중국 외교부는 해당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입장과 함께, 미 재무부의 일방적 제재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WSJ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