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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사] 내 취미는 ‘중고거래’
2020-09-10 16:06 경제

※ [다.만.사] 다양하게 만난 사람들. 경제부에서는 A부터 Z에 이르는 취재원을 만납니다. 취업시장이 얼어붙자 발이 묶인 20대 취준생부터 인생 첫 주식 투자에 뛰어든 30대, 평생 일했지만 내집 마련을 못한 50대까지. 2분 짜리 리포트에 미처 풀지 못한 경제와 사람 이야기를 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취재의 맥락을 좀 더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당근하세요?"
평범한 '안녕하세요' 말고 당근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요즘 지하철 개찰구나 동네 공원에서는 이런 인삿말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바로 지역기반 중고거래 앱인 '당근마켓' 유저들끼리 거래할 때 건네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당근 쓰시는 분 맞죠?'를 뜻하는겁니다.
들어는 봤는데 도대체 뭔가 궁금하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동네 주민들끼리 반경 6km 내에서 직접 만나 중고거래를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앱입니다. 그런데 이 서비스가 국내 전자상거래 앱 전체에서 2위를 차지한 겁니다. 1위가 국내 최고 유통업체인 '쿠팡'이니 정말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는거죠.
왜 이렇게 많이 쓸까? 제 기획은 이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중고거래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온라인에서는 '중고나라'라는 사이트도 이미 모두에게 익숙할 정도인데 말이죠. '도대체 뭐가 다를까'하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바로 "재미있다"는 겁니다. 제가 만나본 인터뷰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즐겁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20대 직장인 윤지예 씨는 인터뷰 날, 저와 같이 나가서 계산기 1대를 2천원에 판매했습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계산기를 그냥 버리느니 단돈 2천원이라도 가격을 매겨보는 행위, 사진을 요리조리 찍고 앱에 올렸을때 사람들로부터 관심 버튼을 받는 순간, 퇴근 후에 집에서 계산기를 챙겨 나와서 구매자에게 건네는 과정. 이 모든 것이 재미있다고 합니다.
또, '무료나눔'도 쏠쏠한 재미중 하나라고 알려줬습니다. 버리긴 아깝고 그렇다고 내가 쓰지는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죠. 무료나눔을 많이 할수록 '매너온도'가 올라가게 됩니다. 36.5도에서 시작하는데 지예씨는 40도에 이를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수준이었죠. 앱 내부에서는 일종의 '신뢰도'가 올라가게 되는 겁니다. 높은 신뢰도가 쌓일수록 뿌듯한 마음에 더 거래를 활발해지는 구조인 셈입니다.



중고거래가 마치 게임처럼 '놀이 문화'로 자리잡은 겁니다. 제가 만나본 두번째 인터뷰이 대학생 손다영 씨. 자취방을 옮기면서 살림살이 대부분을 중고거래로 마련한 '프로 당근러'였습니다. 3만원에 새 것 같은 전자레인지를 샀고, 주방세제같은 간단한 살림도구들은 거의 2천원대에 얻었습니다. 차곡차곡 중고거래 경험이 쌓이면 새로운 '뱃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다영 씨는 인터뷰 도중, 획득한 뱃지들을 제게 찬찬히 보여주었습니다. '거래의 시작', '추억 나눔', '득템의 시작' 이름부터 눈길을 확 끌었습니다. 판매 게시글을 100개 이상 작성한 경우 얻는 '비우는 재미'라는 뱃지는 저도 탐이날 정도였습니다. 처음엔 생각없이 거래했는데 우연히 이 뱃지를 받고 나서부터는 은근 채워나가는 재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귀찮은 거래가 아닌 게임 퀘스트를 깨는 기분까지 든다는 거죠.



"기자님은 당근으로 뭐 사보셨어요?"하는 질문을 취재 기간 내내 인터뷰이들에게 받았습니다. 몇 년 전, 큰 맘 먹고 온라인 중고거래로 게임기를 사려다가 벽돌을 택배로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뼈아픈 추억에 선뜻 중고거래에 맘이 열리지 않는다고 털어놓자 다들 각자의 즐거운 중고거래 에피소드들을 말해주었습니다. 20대 직장인 소연씨는 회사 사무실 이삿날에 가재도구를 중고거래 앱에 내놓고 판 돈으로 팀원들끼리 아이스크림을 사먹었고, 인터뷰때 입었던 시원한 블라우스도 저렴하게 중고거래로 '득템'했다고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중고 직거래로 좋은 인연을 만난 사람들도 있다는 솔깃한 이야기까지 들려주더군요. 이들에게 중고거래는 물건을 사고파는 걸 넘어선 '소통'거리이자 '취미'였습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밀레니얼제트(MZ) 세대'의 시대가 왔다며 인기 요인을 콕 찝었습니다. 우선, 80년대 후반부터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앱과 결합한 중고거래는 전혀 거부감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확보된 상태에서 오프라인에서 미팅을 한다는 건 오히려 '두근거림'을 선사하게 된다는거죠. 거기에 더해 환경친화적인 소비로 트렌디함까지 갖췄기 때문에 인기가 고공비행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특히, IT기술이 날로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더 차별화된 중고거래 앱이 등장해 '앱 경제'를 이끌 수도 있는 상황. 앞으로 또 어떤 재미있고 신박한 중고거래 앱이 탄생할지 좀 더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박정서 기자 emot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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