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5 13:36 정치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3일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필리버스터를 마친 후 의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출처 : 뉴스1)
'독한' 장동혁.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그제(23일) 24시간 역대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우며 얻은 수식어입니다. 제1야당 대표로서 선명성과 투쟁력을 보여줬단 거죠. 지난 8월 당 대표 선출 이후 맞은 최대 리더십 위기를 몸을 던져 돌파한 장 대표. 24시간 필리버스터를 왜, 어떻게 했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리더십 위기 돌파 최적 카드
국민의힘 지도부는 장 대표가 직접 필리버스터 주자로 나서는 안을 2주 전부터 검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헌정 사상 야당 대표가 필리버스터에 나선 전례가 없지만,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은 사법 체계 근간을 흔들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고 본 겁니다.
시점상 위기 돌파 카드도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12·3 비상계엄 1주년에 사과를 거부하면서 당내 반발에 부딪혔고 언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엄 사과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 친한(한동훈)계 공격같은 내부 이슈가 아닌 대여 투쟁은 당내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법 이슈 토론은 본인 주특기이기도 했습니다. 판사 출신인 장 대표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간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성낙인 서울대 명예교수의 '헌법학',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등 5권의 책과 언론 칼럼·사설을 담은 서류 박스를 두팔 가득 끌어안고 연단에 올라 시선을 끌었습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필리버스터를 마친 뒤 서류 박스를 끌어안은채 이동하고 있다. (출처 : 뉴시스)
최근 시도하고 있는 '강성 이미지 톤 다운'과도 결을 같이합니다. 장외 규탄대회 연단에 올라 목에 핏대 세우는 대신 동료 국회의원과 대중에게 법안의 위헌성을 차분히 설명하는 장면을 연출한 겁니다. 전국민에게 생중계되는 필리버스터는 가장 효과적인 이미지 메이킹 수단이었습니다. 장 대표는 최근 최고위원회의 모두 발언에서도 메시지 수위를 조절하고, 연탄 봉사 현장을 가는 등 이미지 전환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부산 지역 한 의원은 "당내에서 (장 대표 향해) '단식을 하라'는 압박이 있었는데 고심 끝에 24시간 필리버스터라는 좋은 솔루션을 선택했다"며 "본인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장 대표가 목소리나 인물도 좋기 때문에 전략적 결정을 잘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막판까지 고민했던 건 더불어민주당의 돌발 행동 변수였습니다. 장 대표 측 관계자는 "민주당이 항의하고 고성을 지르는 상황에서 대표가 직접 싸우기도, 안 싸우기도 애매할 수 있다"며 "야당 대표가 밖에서 싸우는 것과 본회의장 안에서 싸우는 건 다른 문제"라고 했습니다. 민주당은 장 대표의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자마자 곧장 퇴장하는 철저한 '무시 전략'을 썼습니다.
구강 스프레이·마사지볼·휴대형 산소캔 공수
국민의힘 원내대표실 이건용 국장 개인 SNS
24시간 동안 연단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정신력, 그리고 원내의 지원사격이 있었습니다. 정희용 사무총장과 박준태 비서실장, 유상범 원내수석부대표 세 사람은 장 대표와 함께 밤을 꼬박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송언석 원내대표도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다 새벽 일찍 돌아왔다고 합니다. 송 원내대표는 장 대표가 당내에서 공격받을 때마다 묵묵히 지원사격하며 장 대표와 긴밀히 소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그동안 있어왔던 당 대표와 원내대표 간 기싸움이나 갈등은 없는 걸로 평가 받습니다. 그는 새벽에 의원 전원에게 "경내 도착하는 대로 본회의장에 입장해 장 대표를 위해 힘을 보태달라"는 문자를 발신하기도 했습니다.
의원들은 20명씩 조를 짜서 본회의장을 지켰습니다. 옛 친윤(윤석열)계나 친한계 등 계파 구분은 없었습니다. 밤 늦은 시간 남은 한 친한계 의원은 "당 소속 의원으로서의 기본 도리"라고 했습니다. 당 대표가 직접 필리버스터에 나서는데, 자리를 텅텅 비울 순 없다는 거겠죠. 장 대표는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측근들에게 "응원군 한 명, 한 명이 정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연단에 내려와서는 도열한 의원 60여 명으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죠. 김대식 의원과는 얼싸안았습니다. 당 대표 선출 이후부터 줄곧 내부에서 "친장계가 없다"는 지적과 함께 당내 집중 공격을 받고있던 때라 장 대표로서는 더 큰 위안을 얻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 대표실 당직자들과 박 비서실장은 장 대표 상태를 지근거리에서 실시간 모니터링하며 지원에 나섰습니다. 눈이 침침해지고 목이 쉬자 안약과 구강 스프레이를 준비했고, 본회의장 내부 공기가 탁한 것을 우려해 밤 늦은 시간 휴대형 산소캔도 긴급 공수했습니다.
장 대표가 화장실 가는 사이, 당 관계자가 잠을 깨기 위한 마사지볼을 슬쩍 건네주기도 했는데요. 장 대표는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나오며 취재진 앞에 서기 직전 돌연 발걸음을 옮겨 원내대표실 이건용 국장에게 이 마사지볼을 쥐어줘 눈길을 끌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출신인 이 국장은 추경호 원내대표 시절부터 권성동, 송언석 원내대표까지 당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궂은일을 도맡아한 것으로 당내에서 평가 받습니다. 현장에 있던 한 의원은 "진짜 당을 위해 일해온 동지와 전우애를 나눈 것 아니겠나"고 했습니다.
측근들은 도중에 장 대표의 24시간 완주를 만류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장 대표가 필리버스터 당일 거의 잠을 자지 못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 관계자는 "장 대표가 새벽에 잠이 깨 직접 손으로 필리버스터 원고를 썼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그래서 필리버스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도 오후 시간부터 목이 확 가라앉고 컨디션이 떨어졌다"며 "머리가 멍해진다는 순간 믹스커피를 타줬다"고 했습니다. 새벽 시간대에는 아직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컸다고 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부은 종아리였습니다. 장 대표는 24시간 동안 여섯 차례 화장실을 다녀올 때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는데요. 새벽 시간대 현장에 있던 한 의원은 "(장 대표가) 다리를 휘청이며 '정신만 멀쩡하다'고 어울리지 않는 약한 소리를 하다가도 의원들을 보면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걸었다"고 떠올렸습니다.
24시간을 꼬박 버티기 위해 발포 비타민을 탄 물의 힘도 빌렸습니다. 장 대표는 당일 아침 계란 1개와 바나나 1개만 먹었다고 합니다. 장 대표 측 관계자는 "장 대표가 원래 아침을 먹지 않고, 대정부질의나 주요 일정이 있을 땐 특히 속을 비운다"고 귀띔했습니다. 장 대표는 사석에서 "늦깍이 고시 공부를 해봤기 때문에 잠 안 자고 밥 안 먹는 건 자신있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장 대표는 행정고시 합격 후 교육부 공무원을 지내다 30대에 뒤늦게 사법고시를 패스했죠.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지도부와 함께 한 점심 자리에선 "어릴 때 가난해서 매일 점심을 집에 가서 먹고 와야 했는데, 왕복 50분을 뛰었다"고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리더십 제고 '반전' 얼마나 갈까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동료 의원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출처 : 뉴시스)
필리버스터 24시간 완주로 장 대표가 일단 추락하던 당내 리더십을 다시 세우는 계기를 마련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당을 위해 24시간을 버텨낸 당 대표에게 당장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의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과 논란 국면에서 친한계와 초·재선 뿐 아니라 '원조 친윤' 윤한홍 의원에게 면전에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하는 꼴"이라고 면박을 당해 장 대표의 령(令)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는 게 그동안 당내 기류였습니다. 장 대표도 위기감을 느낀듯 직후 경청 행보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 후 장 대표 측("내가 장동혁이고, 우리가 장동혁"-강명구 조직부총장)뿐만 아니라 장 대표에게 쓴 소리를 해온 인사("그의 투혼이 경이로우면서 동시에 애처롭다"-양향자 최고위원)와 친한계("역사적인 정치인들의 단식투쟁에 비견될 만큼의 결기와 책임감이 느껴졌다"-우재준 최고위원)까지 한 목소리로 장 대표를 추켜세웠습니다. 한동훈 전 대표도 어제 저녁 "우리 당 장동혁 대표가 혼신의 힘을 쏟아냈다"며 "모두 함께 싸우고 지켜내야할 때"라고 했습니다. 장 대표가 필리버스터를 마친지 하루 반나절 만이었습니다.
한 친한계 의원은 "필리버스터가 좋은 카드였던 건 맞지만 하루이틀이면 소멸할 이슈"라며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진짜 노선 전환 없이는 백약이 무효라는 건 본인이 느껴야한다"고 했습니다. 필리버스터라는 '일회성 쇼'보다는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당원 게시판 사건 처리, 윤 전 대통령과 절연 등 눈에 보이는 '행동'이 핵심이라는 겁니다. 다른 중진 의원도 "장 대표가 사과를 거부하고 원내 경청 행보에서도 뚜렷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의원들 사이 실망하는 분위기가 크다. 필리버스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필리버스터로 국힘 유튜브 구독자 늘어
장 대표가 필리버스터로 얻은 건 또 하나 있습니다. 당원들의 호응입니다. 필리버스터 도중 국민의힘 유튜브 방송 구독자는 5000명가량 늘어 5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필리버스터 생중계는 새벽 시간대에도 동시 접속자 3000명을 찍다가, 막판에는 1만명을 넘겼다고 합니다. SNS상에는 장 대표를 지지하는 응원 댓글이 폭발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장 대표 취임 후 당에 당비를 내는 당원 수는 전당대회 대비 21만가량이 늘어 100만 명에 육박합니다.
야권의 한 인사는 "이번 계기로 장동혁 팬덤이 확실히 생겼다"며 "지능캐(지적인 캐릭터)인데 돌쇠 스타일인 게 반전 매력이고 진정성에 당원들이 호응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성층 사이에선 계엄에 대해 굴욕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충남 연설같은 방식으로 한 것에 대한 지지 정서가 분명히 있다"고 했습니다.
장 대표의 새해 외연 확장 행보에도 그 중심엔 당원들이 있을 걸로 보입니다. 장 대표는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측근에게 "당원들을 생각하니까 버틸만 했다"며 "내가 최장 기록을 세워야한다 이런 게 아니라, 지켜보는 당원들에게 '효능감'을 줘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장 대표가 말하는 이 당원을 두고 한 쪽은 '당심'이라 의미 부여를 하고, 한 쪽은 '짠물'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비중 계산도 제각각입니다. 106명 의원들 생각도 모두가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제2의 황교안, 극우 정치인으로 쪼그라들지 당심을 기반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려 당을 장악할지는 장 대표에게 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