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동해에서 조업하다 강제 납북된 어부만 160여 명입니다.
남한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간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는데요.
진실화해위원회가 51년 만에 국가의 잘못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이기상 기자입니다.
[기자]
1971년 9월, 열일곱 살 조해웅 씨는 형이 선장이던 오징어 잡이배를 타고 동해로 조업 나갔습니다.
[조해웅 / 납북귀환어민]
"밑에 칸에 잠자는데 근데 총소리가 막 나니까 한참 있다 보니까 막 북한군들이 총 들고 배에 올라온 거야."
북한으로 끌려갔는데 비슷한 시기 이렇게 납북된 어부만 160명.
이들은 북한에 억류돼 김일성 찬양 교육을 받고 공장 시찰을 다녀야 했습니다.
[김춘삼 / 납북귀환어민]
"김일성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든가 그런 식의 교육이었죠.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는 아무것도 없어요."
적십자회담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던 이듬해 9월, 북한은 이들을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그 날 밤부터 검찰과 경찰의 조사를 빙자한 고문이 시작됐습니다.
[조해웅 / 납북귀환어민]
"이렇게 장작개비 끼워 넣고 올라타고, 묶고, 고춧가루 해가지고 붓고 너희들은 죽어도 하소연할 데 없다고 간첩으로 모는 거지."
결국,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습니다.
'간첩' 꼬리표는 본인과 가족들에게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김춘삼 / 납북귀환어민]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서 좋은 곳에 취직을 못 했어요. 간첩이라는 누명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는 납북귀환어민들에 대한 국가의 부당한 처벌과 불법 감시·사찰이 있었음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간첩 멍에를 쓴지 51년 만입니다.
[김춘삼 / 납북귀환어민]
"그 힘든 멍에를 벗는다는 게 가장 기쁜 일이죠. 일단은 그 이상 더 좋은 것은 없어요."
채널A 뉴스 이기상입니다.
영상취재 : 박연수
영상편집 : 이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