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프랑스에서 와인을 거의 매일 마시는 사람은 11%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와인 전문 매장까지 이런 공지를 내놨습니다.'맥주를 팝니다’란 뜻입니다.
와인 종주국의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닌데요.
프랑스 와인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요?
Bonjour a tous! 안녕하세요.
동아일보와 채널A의 조은아 특파원입니다.
낭만과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전해드립니다.

▶ 프랑스의 유구한 와인 사랑
와인 하면 유럽의 3대 생산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꼽는데요.
사실 와인 종주국이 어디냐를 두고 유럽 국가들의 기 싸움이 상당합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 FAO 자료에 따르면요.
2020년 기준 포도 재배면적은 스페인이 단연 1등이지만
와인 생산량으로는 이탈리아가 1위입니다.
하지만 소비량으로 따지면 프랑스가 1위인데요.
와인에 대한 사랑만큼은 프랑스를 꺾기 쉽지 않아 보였죠.
하지만 프랑스의 와인 사랑은
이제 옛 이야기가 돼 버렸습니다.
프랑스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980년에는 프랑스인의 절반인 51%가 “거의 매일 와인을 마신다”고 대답했지만
2022년에는 겨우 11%가 “매일 혹은 거의 매일 마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35세 미만은 아예 안 마신다는 비율이 절반이나 된다고 하네요.
그 이유를 살펴보기 전에 프랑스 와인의 역사를 잠깐 보면요.
기원전 6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마르세유로 이주한 그리스 정착민들이 프랑스 최초의 포도원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기독교에서는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면서
신의 선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문명이 확산되면서 포도주 문화도 함께 퍼져 나갔는데요.
그래서 초창기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제조한 기술자들은 교회의 수도사들이었죠.

와인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떼루아라고 들어보셨을 텐데요.
프랑스어로는 땅, 토양을 의미합니다.
주류업계에서 떼루아는 토양뿐 아니라 술이 만들어지는 자연환경을 통칭하기도 하는데요.
프랑스는 포도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라 명품 와인을 탄생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거죠.
지역별로 기후와 토양도 다양해 색다른 와인들도 생산되는데요.
‘와알못’들도 안다는 보르도, 부르고뉴 와인부터 알자스, 루아르 와인까지
전식, 메인요리, 후식 등 전부를 책임질 수 있는 다양한 와인들이 나올 수 있죠.
여기에 철저한 품질 관리 정책 또한 프랑스 와인의 유명세를 키웠는데요.
프랑스 정부에서 우수한 지역 특산품에만 부여하는 AOC와 같은
품질 관리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서 외면 받는 와인?
보시다시피 프랑스는 하늘이 내려준 와인의 나라인데
프랑스에선 와인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식고 있습니다.
제가 파리에서 프랑스인들과 식사할 때도
와인을 많이 마시진 않더라고요.
특히 젊은 파리지앵들은 맥주나 칵테일을 선호했습니다.
실제 파리 길가의 식당들엔 맥주가 유독 많이 보입니다.
와인 전문 매장들 조차 다양한 맥주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와인 홀대, 왜 그런 걸까요?
우선 젊은 층을 중심으로 건강을 중시하면서 술 소비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프랑스의 주요 먹거리로 버터, 크림, 와인을 꼽는데요.
최근 젊은 층은 이 3대 먹거리를 다 멀리한다고 합니다..
기름지고 알코올이 가득한 음식 대신 비건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신 술이 그리운 이들은 목테일을 마시는데요.
과일은 물론 커피, 티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무알코올 칵테일이
와인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 과거에는 약이었던 와인, 이제는 1급 발암물질?
좀전에 프랑스인들이 건강 때문에 와인을 멀리한다고 했지만
원래 와인은 과거엔 약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적당한 양의 와인은 병을 치료한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하죠.

당시 환자들에게 와인을 처방하기까지 했다는데요.
와인을 마시면 피부 노화, 탈모를 막을 수 있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고 했답니다.
현대 의학 역시 한 두 잔의 와인은 항산화 효과를 내기 때문에
특히 노인 건강에 좋다고 인정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2023년 세계보건기구 WHO가
"술은 단 한 잔이라도 건강에 해롭다"며
1군 발암 물질로 낙인을 찍는 바람에
와인 역시 쇠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 여전히 높은 프랑스 와인의 콧대
프랑스인들의 와인 홀대, 그 두번째 이유는
생산업자들의 과도한 자존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얼마 전 주말에 알자스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평소 좋아하는 와인 생산지를 직접 들러 봤는데요.
직접 가면 좋은 와인을 싸게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죠.
그런데 이 생산자가 와인을 팔 수 없다면서 거의 문전박대를 하더라고요.
와인이 자기 기준에 미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업자는 온라인에서도 1인당 2, 3병씩 소량만 주문을 받아 깐깐하게 판매하거든요.
엄격한 품질 관리와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시장의 요구를 잘 반영하고 더 소통해서 판매를 늘렸다면
더 성공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이런 위기는 일찍이 예고되기도 했었습니다.
1976년 발생한 ‘파리의 심판 사건’을 아시나요?
당시 프랑스는 유럽이 아닌 미국이나 호주에서 나는 와인은
‘듣보잡’으로 취급했었죠.
그런데 한 영국의 와인 전문가가 어떤 와인이 맛있는지 평가해보자며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제안한 겁니다.
쟁쟁한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이 가소롭다는 듯
이 이벤트에 참석했는데요.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든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미국 와인이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건데요.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할 것없이
모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와인이 1등을 휩쓸면서
프랑스의 자존심을 그야말로 짓밟은 겁니다.
▶ 와인 한 병이 사치가 된 시대
다음으로, 최근 세계적인 경기 침체도 와인 추락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경기가 어려우니 가성비가 정말 중요해졌죠.
파리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한 푼이라도 아껴 끼니를 때우려고
한국 돈 5000원 정도 되는 샌드위치를 찾아 빵집 앞에 긴 줄을 섭니다.

샌드위치마저 싼 걸 찾는데 비싼 와인을 마실 여력이 없겠죠.
프리미엄화 된 와인은 특히 사기 힘듭니다.
물론 스파클링, 화이트, 로제 등 비교적 저렴한 와인들은
수요가 탄탄한 편입니다.
주류 선택지가 늘었다는 점도 와인의 추락을 부추기고 있는데요.
요즘 한국 소주, 일본 사케와 같이 아시아의 술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뻔한 와인에 지루함을 느낀 이들이 색다른 술을 찾는 것이죠.
날씨도 한 몫 하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로 날씨가 더워지면서 상온의 와인보다는
청량감이 강하고 시원하게 쭉 들이킬 수 있는 맥주가 더 당기는 거죠.
프랑스인들의 업무 문화가 바뀐 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프랑스는 근무를 하다 점심에 술을 마시는 데 관대한 편으로 유명하죠.
유럽 정치인들은 과거에 업무를 보는 중에도
와인이나 샴페인을 즐기곤 했는데요.
정치권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이런 분위기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특히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취임 이후 그 추세가 뚜렷해 졌다는데요.
의원들의 와인 소비량이 대폭 줄어들고
대신 다이어트 콜라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하더라고요.
▶ 처치 곤란한 프랑스 와인?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23년에는 재고로 쌓인
와인 4억병을 대거 폐기했다고 합니다. 4억병, 상상이 안 가시죠.
올림픽 공식 수영장 100개 이상을 채울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와인의 유명 산지인 보르도에선 붉은 피가 아닌 붉은 와인이 낭자한
‘보르도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프랑스 정부가 나서 포도 농가 구조조정에 나섰는데요.
그 구조조정이 무엇이냐. 포도밭을 갈아 엎는 겁니다.
지난해부터 2029년까지 포도 재배 허가를 포기하는 농가에
보조금까지 지급해가며
포도밭을 없애고 있는데요.
사라질 포도밭이 최대 3만㏊,
무려 축구장 4만2000여 개 면적이라고 합니다.
아까운 와인을 버릴 수만은 없어 일부는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도 했는데요.
와인은 약품과 화장품에 사용하는 공업용 알코올로 변신하기도 했습니다.
손 소독제나 향수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니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팔리기 위한' 프랑스 와인의 노력
와인은 다른 술에 비해 용량이 꽤 큰 편이죠.
맥주만 봐도 캔, 유리병, 페트병 등 다양한 용기에
다양한 사이즈로 팔리고 있잖아요
하지만 와인은 다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보는 와인병의 크기는 표준 규격인 750㎖인데요.
물론 그보다 더 큰 것도 작은 것도 있지만
시장에 유통되는 와인병의 대부분이 표준 규격입니다..
1974년 말 유럽에서 액체 제품 용량을 표준화하면서 생긴 사이즈인데요.
2007년 대부분 규정이 사라졌지만 와인만은 예외로 했다고 하네요.

문제는 한 번에 마시기 너무 크다는 건데요.
그렇다 보니 와인을 한 병 사기가 더 부담스럽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수요를 반영해 와인을 소량씩 담은 ‘미니 와인’들이 나오고 있어요.
건강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수요를 고려해
인공 첨가물을 넣지 않은 내츄럴 와인들도 내놓고 있습니다.
▶ 트럼프가 일으킨 '술의 전쟁', 프랑스 와인에 직격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와인을 공격하고 나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 전 철강, 알루미늄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했죠.
유럽연합이 여기에 대응해 미국산 제품에 보복관세를 예고했는데
문제는 여기에 버번 위스키가 포함됐다는 겁니다.
유럽의 와인만큼이나 미국의 버번 사랑 또한 특별하죠.
트럼프 대통령, 여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또다시 대응했는데요.
유럽이 당장 보복관세를 철회하지 않으면 유럽산 와인에
2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200% 관세라니! 트럼프의 분노가 느껴집니다..
트럼프의 25% 관세는 4월 1일부터 시행 예정인데요.
유럽연합은 협상할 의향이 있다면서도
만약에 무산되면 보복 관세를 강행하겠단 입장입니다.
유럽연합의 으름장에 프랑스 정부, 냉가슴만 앓고 있는데요.
프랑스 총리는 공영 라디오에 출연해서
이번 보복관세에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프랑스 샴페인 업계는 벌써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200% 관세가 현실화되면
18만 원짜리 샴페인이 하룻밤 사이에 56만 원으로 오른다는데요.
와인 가격도 이런 규모로 급등할 것으로 우려됩니다.
미국도 질 좋은 와인이 나오는 마당에
누가 굳이 값비싼 프랑스산 와인을 사 먹을까요.
프랑스 총리가 정말 깜짝 놀랄 만하죠.
Paris est toujour paris. ‘파리는 항상 파리이다’란 뜻을 담은 이탈리아 영화의 제목입니다.
영화 내용과 별개로 파리는 정말 변하지 않는 곳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제가 20여 년 전 학생 때 찾은 파리와 특파원으로 살고 있는 파리는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그렇게 좀처럼 변하지 않는 파리에서 파리의 와인은 격변기를 겪고 있네요.
와인도, 파리도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재미있는 소식과 함께 또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Au Revoir!
취재 : 조은아 기자
제작 : 김도현 CD
작가 : 박정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