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 단식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뉴스1)무기력한 국민의힘. 지난 1년 동안 국민의힘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력', '무기력함'이라고 의원들은 입을 모읍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 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그리고 대선 패배까지. 한 중진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탄핵을 두 번 당하다보니 무력감이 든다. 열정이 식었고 예전같지가 않다"고 털어놨습니다.
'내란 정당'이란 주홍 글씨는 강력했습니다. 여론은 국민의힘에 등을 돌렸습니다. 여대야소 국면에서 106석 소수 야당으로 국회에선 법안 하나 통과시킬 수 없는데, 여론마저 받쳐주지 않자 그야말로 무력 정당이 됐습니다. 야당으로 밀려나면서 대통령 거부권이란 최후의 브레이크도 사라졌습니다.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등 민주당이 입법을 강행할 때마다 "강력히 규탄한다"는 메시지가 무색하게 대책은 없었습니다. 다음 행동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엔 비보도를 전제로 한 백브리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한 재선 의원은 "우리끼리 자조섞인 말로 국민의힘은 '제2야당'이라고 한다"며 "제1야당인 '무당층'의 지지를 흡수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주당이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국민의힘이 매력적이지도 않다는 겁니다.
무기력한 당의 힘 없는 대표
그래서일까요. 지난 전당대회에서 당은 인물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원내대표 등 주요 당직을 거친 중진 의원이라면 도전해볼만한 당 대표 선거에 소위 '선수'들은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총선 공천권이 없기 때문에 리더십을 세우기 어려운데다 이재명 정부 초기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은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한 의원은 "이번 당 대표는 '바지 사장', '얼굴 마담', '욕받이'"라고 했습니다.
'1.5선 장동혁 당 대표'가 등장한 건 그래서입니다. 무기력증에 빠진 국민의힘에서 힘 없는 당 대표를 뽑는 선거가 아니었다면 장동혁 당 대표도 없었을 거라고 의원들은 말합니다. 전당대회 초반 지지율 한자릿수에서 시작한 장 대표의 당선은 반전이었습니다. 직전 대선 후보(김문수 전 장관)를 꺾었습니다. 3년가량의 짧은 정치 경력 동안 당 사무총장과 선거대책위원회 종합상황실장 타이틀을 달고 총선과 대선이란 가장 굵직한 선거 실무를 이끌긴 했으나 당내에선 여전히 '정치 신인'이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장 대표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한 의원은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는 당 대표가 자신의 계파를 만들고 리더십을 세우는 건 공짜"라고 했습니다.
"국힘 봐달라" 최후 수단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단식 8일 만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단식 중단 권고를 받아들여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출처 : 뉴스1)장 대표가 통일교·공천헌금 '쌍특검'을 요구하며 목숨을 건 단식에 들어갔던 건 야당의 무력감을 깨부수기 위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지도부 한 인사는 "가장 중요한 건 당원들에게 '우리 당이 뭔가를 한다'는 '효능감'을 줘야한다는 것"이라며 "그래서 규탄대회도 하고 24시간 필리버스터도 버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얻어낸 게 없더라도 당원에겐 그래도 '해냈다', '이겼다'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 장 대표 당선 이후 비토 세력으로부터 받는 가장 큰 비판의 지점 중 하나는 "국민의힘이 하는 게 없다", "장동혁이 당 대표 되고 뭘했나"였습니다.
한 재선 의원은 "일단 국민들이 국민의힘을 쳐다보게 해야하다"며 "지금은 우리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식은 '우리를 좀 봐달라'는 처절한 최후의 호소"라며 "아무리 대여투쟁 메시지를 세게 내고 대안 정책을 내놔도 지금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장 대표의 선택지는 단식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장 대표도 이같은 점을 가장 잘 알고 있겠죠. 그는 어제 단식장을 찾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에게 "야당이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손 글씨·최고위·산책 여론전
최후의 수단인만큼 여론전에 공을 들였습니다. 정부·여당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단식 투쟁에 국민의 관심은 절박했습니다. 단식 4일차부터는 손 글씨로 단식 중에 느끼는 절절한 심정을 매일 전했습니다. 때로는 시처럼, 어떤 날은 결의문같은 손 편지를 띄웠습니다. 메시지 내용에 따라 글씨체를 바꾸는 정성도 쏟았습니다. 장 대표는 학창 시절 서예를 배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단식 농성 중 쓴 손 글씨 메시지. (출처 : 장동혁 대표 페이스북)최고위원회의(5일차)가 열리지 않았던 6일차에는 단식 돌입 후 처음으로 국회 본청 밖으로 잠깐 나가 취재진에게 입장을 밝혔습니다. 언론 노출 공백을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7일차에는 쌍특검을 고리로 공동 투쟁하기로 한 이준석 대표의 조기 귀국, 8일차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방문이 있었습니다.
장 대표는 단식 카드를 지난해 11월 말부터 준비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장 대표 측은 "단식을 위해 식사량을 줄이고 체중을 8kg이나 감량했다"며 "그런데 24시간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몸의 밸런스가 깨진 상황에서 곧바로 단식에 들어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장 대표는 물과 소량의 소금만 섭취한 채 수액 등은 일체 거부하는 철저한 단식을 지켰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의사 출신인 서명옥 의원은 오늘(22일) 언론 브리핑에서 "더이상 단식은 생명이 위독하고 향후 회복이 불가하다는 의료진의 권고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원 중심' 리더십 시험대
궁극적으로는 리더십을 세워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장 대표는 당선 후 두 달가량의 '허니문' 기간을 지나고서는 끊임없이 당내 비판의 중심에 섰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면회와 "우리가 황교안" 발언으로 시작된 리더십 위기는 지난해 말 '계엄 사과 거부'를 거치며 극한에 달했고 최근 윤리위원회의 한동훈 전 대표 제명 결정으로 폭발 직전까지 갔습니다. '장동혁 지도부 붕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고, '장동혁 사퇴 찬반'을 묻는 언론사 여론조사까지 등장했습니다.
당내에선 "도대체 왜 저러나", "당 대표 후보와 당 대표는 달라야하는데 강성 지지층 눈치만 본다"는 쓴소리가 이어졌습니다. 한 야권 인사는 "최근 몇 달 동안 당에서 '장동혁 욕하기 운동대회'가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장 대표가 말하는 '당원 중심', '당성 중시' 전략은 기존 보수 정치의 문법인 "집토끼는 어차피 선거 때면 우리를 찍는다"와 달랐기 때문에 주요 국면에서 메시지와 행동마다 계속해서 내부 비판에 부딪혔습니다. 한 전 대표 등과 화합하는 게 아니라 "내부총질 세력은 정리할 것"이라고 강경 드라이브를 굽히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지 않는 길을 걷다보니 불확실성이 컸습니다. 장 대표는 사석에서 "가장 괴로운 건 내가 가는 길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당 관계자는 "장 대표가 힘든 건 본인이 하고자 하는 걸 그대로 못하고 꺾이는 것"이라며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반발을 수용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장 대표는 새해 계엄 사과나 한 전 대표 제명 결정 보류 등 주요 국면에서 일정 부분은 타협을 했습니다.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응원 꽃바구니를 바라보고 있다. (출처 : 뉴스1)장 대표의 전략에 당 안팎에선 전반적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지만, 일각에선 재평가하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당의 한 인사는 "원내 의원들을 중심으로 조직표를 동원하는 시대는 저물었고, 이제 당원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여론을 이끈다"고 했습니다. 한 초선 의원도 "여의도 문법이 바뀌었다"며 "기존 미디어가 아니라 강성 지지층이 호응하는 유튜버가 당 여론을 주도하는 건 민주당도 마찬가지고, 장 대표는 이걸 예민하게 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론조사 업체 리얼미터가 지난 15~16일 무선 자동응답(ARS) 방식으로 실시해 지난 20일 발표한 정기 여론 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37%로 전주(33.5%)보다 상승했습니다. 특히 대구·경북에서 지지율은 60.6%로 전주보다 15%포인트 이상 상승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지도부 내부에서는 장 대표의 단식과 맞물려 한 전 대표의 제명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이달 들어 당비를 내는 당원 수는 사상 처음 1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지난 8월 장 대표 취임 당시 75만 명 수준에서 30만 명 넘게 늘어났습니다.
장 대표의 새로운 초식(招式)은 그가 비주류의 길을 걸어온 것과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장 대표는 서울대·판사 출신이지만, 소위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소년급제'해 엘리트 법관으로 승승장구한 케이스는 아닙니다. 프랑스어를 전공했고 행정고시를 패스해 교육부 공무원을 지내다 뒤늦게 법관의 꿈을 이루고자 사법고시를 보고 판사로 임관했습니다. 학창 시절 역시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 집안에서 어렵게 공부했습니다.
당심 기반 민심으로 확장 '숙제'
장 대표가 단식으로 일단 리더십 위기에서 벗어난 건 분명해보입니다. 목숨 걸고 단식하는 당 대표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당 대표로서 선명한 대여 투쟁력을 보여준 동시에 당은 장 대표의 단식을 계기로 모처럼 결집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한 전 대표 제명에 대한 반발 목소리도 단식 중엔 나오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단식 이후에도 한동안은 장 대표의 리더십을 강하게 흔들긴 어려운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단식장에는 그동안 장 대표에게 쓴 소리를 해온 야권 인사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유승민 전 의원, 또 소장파 모임인 '대안과 미래' 의원들이 장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며 당내 통합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국민의힘 소속 광역자치단체장들 전원과 이준석 대표, 김문수 전 장관도 장 대표를 격려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8일째 단식 중인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를 찾았다. (출처 : 뉴시스)한 야권 인사는 "장 대표의 단식 이유에 대해선 해석이 갈리지만 어찌됐든 당원이 뽑아준, 지금 가장 정통성 있는 사람은 장 대표"이라며 "당 대표에게 힘을 실어줘야하다는 원로들의 권유가 강했다"고 했습니다. 다만 한 전 대표는 단식장 방문을 검토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특히 오늘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단식 현장을 찾았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한 건 2016년 12월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처음입니다. 탄핵으로 사분오열된 국민의힘에 박 전 대통령이 전면 등장한 건 그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장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날 단식을 중단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중요한 건 이번 국면 전환의 기회로 다음 그림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이냐일 겁니다. 일단 특검을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내면 국민의힘이 처음으로 대여 협상에서 성과를 얻게 됩니다. 한 중진 의원은 "여당이 특검을 받으면 흔들림 없는 제1 야당 대표로 우뚝 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협상이 무산되더라도 그만큼 지지층을 결집하고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일정 부분 흡수할 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지방선거에 플러스 요인이고 제 1야당 대표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단식으로 공고해진 당원의 지지와 팬덤층도 앞으로 장 대표 정치를 지원할 든든한 우군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 의원은 "당원과 지지자들이 당에 바라는 건 당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라며 "그래서 24시간 필리버스터도, 이번 단식에도 호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종 목표는 당심을 바탕으로 한 민심으로의 확장, 지방선거 승리입니다.
당의 한 인사는 "야당 대표가 리더십을 잃으면 끝장"이라며 "정부·여당이 야당을 우습게 보고 마음대로 폭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리더가 되면 마냥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서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다"며 "권력이란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힘들다"고 했습니다.
한 의원은 "단식이란 참 잔인하다"며 "진짜 생명에 위협이 생길 때 그 힘을 갖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장 대표는 이날 취재진에 "좀 더 길고 큰 싸움을 위해 오늘 단식을 중단한다"며 "그러나 부패한 이재명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의 폭정을 향한 국민의 탄식은 오늘부터 들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진정한 단식은 오늘부터가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무기력증에 빠진 국민의힘에 효능감을 주고 당내 리더십을 세우기 위한 최후의 승부수, 장 대표의 '단식 정치'는 끝났고 이제 평가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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