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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앵과 뉴스터디]“내게 배신자라 해도…” 3번의 변신! 김문수의 정치인생史

2025-05-24 15:00 정치

대선 특집 <동앵과 뉴스터디> 오늘도 계속됩니다. 3주 전 전해드린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의 정치인생사에 이어, 이번에는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정치 인생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김문수 후보가 중앙 정치판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선거에 나왔는데, 정치한 지 오래됐죠. 1990년부터 정치를 시작했고, 파란만장했습니다. 30년 동안 세 번의 변신을 한 김문수의 정치 인생! 한 방에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 보수정당으로 간 노동운동가 김문수, 왜?

1980년대 김문수 후보는 유명한 노동운동가였는데요. 6월 항쟁 후 치러진 1987년 대선 때, 전두환 정권에서 민주화 정권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노태우 정권이 탄생합니다. ‘양김’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가 합치지 못 하고 분열되면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겁니다. 그때 김문수 후보는 “이제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90년에 이재오‧장기표 등 민주화운동‧노동운동 세력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합니다. 그리고는 노동운동을 했던 구로공단이 위치한 서울 구로구 지구당위원장을 맡는데요. 하지만, 민중당은 실패합니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던 거죠.

1992년 14대 총선 때 전국구(비례) 후보로 출마하지만, 민중당에서 당선자를 1명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득표율 미달로 당이 해산됩니다. 같은 해 치러진 14대 대선. 당시 김영삼‧김대중‧정주영‧이종찬‧박찬종 후보가 출마했던 대선에 무소속 백기완 후보를 민중후보로 추대했지만, 1%의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며 낙선합니다. 이렇게 김문수의 첫 번째 정치 도전은 아주 쓰라린 패배를 안게 됐고, 1년간 택시 기사로 일을 하다가 중앙 정치무대로 갔는데요.

유시민 작가는 “당시 민중당에 실패한 후에 김문수 집에 가서 ‘민주당으로 가면 TK, 서울대 출신 운동가라는 스펙으로 민주당에 우세한 수도권 쪽 공천은 떼놓은 당상이니 김대중 총재를 한번 만나봐라’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밝혔습니다. 민주당을 거절한 김문수 후보는, 1994년 YS의 민주자유당에 입당을 하죠.

노동운동가에서 보수당의 정치인으로 변신한 배경에 대해 김문수 후보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밖에서 혁명을 계속 꿈꾼다고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했던 생각과 노선이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감옥에도 갔고, 하는 것마다 다 잘 안 됐으니까요. 그런데 잘 안 되는 원인을 따져 보니, 제 생각이 잘못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를 변절자라고 하는 분들의 비판은 다 받아들입니다.”


▶ 험지에서 국회 입성… 선거포스터에 쓴 ‘김문수의 편지’

보수정당 정치인이 된 김문수 후보는 1996년 총선에 출마합니다. 이 총선은 김영삼 대통령이 어려움에 처했다가, 공천 혁명으로 성공했던 선거인데요. 이때 YS는 반대 진영에 있던 노동운동가 김문수와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린 이재오 뿐 아니라 홍준표‧김무성 등도 영입했죠.

김문수 후보는 보수정당으로는 험지인 경기 부천 소사구에 출마합니다. 이곳은 지금도 민주당 의원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구입니다. 또 당시에 경쟁자들이 만만치 않았는데요. 당시 현역 의원은 자민련의 박규식 의원. 숙부에 이어 2대째 소사구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었고, 100억 원대의 자산을 가진 지역유지였습니다. 더구나 민주당 후보는 당시 민주당 대변인으로 유명했던 DJ의 적통, 박지원 의원이었죠. 안 그래도 험지인 데다가, 자민련과 민자당으로 보수표가 나뉘게 된 상황. 그럼에도 초선 김문수 후보가 역전승을 거두고 국회에 입성하게 됩니다. 요즘 김문수 후보가 이때처럼 이번 대선을 뒤집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이 선거 때 포스터를 보면 아주 독특합니다. 포스터에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쫙 적어놓은 건데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해 ‘검은 고무신을 신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등록금 걱정을 하셨지만 기뻐했다… 예복도 청첩장도 없는 결혼을 했다. 아내는 순천 여자, 전자부품 조립공이었다’는 내용부터 ‘나는 문민정부의 무원칙을 비판했다. 김영삼 씨를 만났다. 당신이 들어와서 고치라고 했다. 많이 고민했다. 집권 여당에 입당했다. 넥타이가 어색했다’ 등의 내용을 적어놓았습니다.


당시 김문수 후보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어색하다>는 책을 내니, 박지원 후보가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라는 책으로 맞대응을 한 아주 재미있는 선거이기도 했는데요. 김문수 39.19% vs 박지원 37.25% vs 박규식 16.68%. 박빙의 차이로 당선된 김문수 후보는 부천 소사에서 내리 3선을 합니다.

▶ 저격수이자 비주류였던 김문수의 ‘공천 개혁’

국회에 입성한 김문수 의원은 이재오‧홍준표 의원과 함께 보수정당의 ‘저격수 3인방’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자마자 YS 정권에서 DJ 정권으로 바뀌고, 이어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10년 동안 보수정당은 야당이 됐는데요.

당시 이재오 의원은 ‘병풍’ 김대업 의혹과 관련해서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고, 홍준표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걸 씨 의혹을 제기하면서 최규선 게이트를 폭로했습니다. 김문수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끈질기게 문제 삼습니다. 정부 여당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눈엣가시였을 텐데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야당의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이재오 의원이 이후 당에서 원내총무도 하고, 나중에는 친이명박계 좌장도 했죠. 홍준표 의원도 원내대표와 당대표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세 사람 모두 비주류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격수로 여당도 비판하고 또 자기 당에서도 쓴소리를 많이 했었죠.

김문수 의원이 당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 건, 2004년 17대 총선 때입니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회창 대선 후보의 차떼기 사건이 벌어지고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다가 역풍을 맞으면서 궤멸 위기에 놓입니다. 박근혜 대표가 나타나서 천막당사로 당을 구해내던 시절이죠. 그때 17대 총선 공천을 김문수 의원이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합니다. 박근혜 대표가 선출되기 전, 최병렬 대표가 김문수 의원을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앉혔는데요. 김문수 위원장은 최병렬 대표를 비롯해 당 중진 의원 37명을 불출마시킵니다. 당시 원내총무로 잘나가던 홍사덕 의원이 서울 강남에 출마하려고 하자, 험지인 경기 일산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는데요. 김 후보는 “당시 돈뭉치 가져온 사람은 다 탈락시켰다”고 회고하기도 했죠.

이렇게 공천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과 박근혜 대표가 함께 힘을 모으면서 궤멸 위기에 놓여있던 한나라당이 121석을 얻습니다. 이때 공천도 아주 성공적인 공천으로 꼽히죠.


▶ “사과하라” 박근혜 대표 들이받은 김문수

2004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체제가 됐을 때부터, 탄핵이 된 2017년까지 보수정당은 ‘박근혜 시대’였습니다. 13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실상 보수정당의 주인 역할을 했던 건데요. 이때 김문수 의원을 비롯한 ‘저격수 3인방’은 계속해서 비주류의 길을 걸었고, 박근혜 대표와 각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박근혜 대표에게 집단지도 체제로의 전환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요구했는데요. 총선 후 의원 연찬회에서 한 판 붙기도 했습니다.

이재오 의원은 “독재자의 딸”이라며 공격했고, 김문수 후보는 “당내 유신 세력은 박 대표 이외에는 없다. 유신 독재에 대해서 사과하고,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에서 사퇴하라”고 연찬회에서 세게 들이받았는데요. 당시 박근혜 대표는 “유신 때 피해 본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여러 번 했는데, 또 사과하라는 건 대표 흔들기다. 그렇게 죄가 많은 정당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당을 택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맞대응하기도 했죠.

이 당시를 보면, 오히려 지금 국민의힘보다 훨씬 건강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시 박근혜 대표라는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지만 이런 비주류 중진 의원들이 있었죠. 또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박형준, 오세훈 등 젊은 소장파 의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박근혜 대표에 대한 견제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 국민의힘은 뚜렷한 리더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다양한 목소리도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인 것 같죠.

이런 상황 속에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은 이명박‧박근혜의 대결이 이뤄졌고, 김문수 의원은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차명진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고 두 번째 변신을 합니다.


▶ 친구‧동지 꺾고 경기도지사로… 업적과 과오는?

3선 국회의원이었던 정치인 김문수의 두 번째 변신은 행정가의 길, 경기도지사입니다. 2006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도전했을 때, 경쟁 후보는 바로 김 후보의 40년 지기 친구였던 진대제 전 장관이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을 했던 진대제 전 장관은 김문수 후보와 경북중학교와 서울대를 함께 다닌 친구였는데요. 노무현 정부 말기에 치러진 이 선거에서 김문수 후보는 진대제 후보를 거의 2배 차이로 누르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됩니다.

그런데, 4년 뒤 경기도지사 재선 도전했던 선거는 좀 어려웠습니다.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김문수‧심상정‧유시민 후보가 나섰기 때문인데요. 이 세 사람은 정말 각별한 사이입니다. 김문수 후보 서울대 경영학과 70학번, 심상정 후보 서울대 역사교육과 78학번, 유시민 후보 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입니다. 서울대 출신인 이 세 사람은 같이 노동운동을 했었는데요. 전두환 정권 시절 김문수‧심상정 후보는 1985년 ‘구로 동맹 파업’ 때부터 친해집니다.

1986년 5.3 인천 항쟁 당시 시위 주모자 혐의로 김문수 후보가 잡혀가 고문을 당했는데요. 이때 김문수 후보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심상정의 행방을 불지 않았던 일화도 유명한데요. 이때 김문수 후보와 함께 잡혀간 사람이 유시민 작가의 동생 유시주 씨입니다. 그래서 당시 김문수 후보의 부인인 설난영 씨와 유시민 작가가 함께 보안사 앞에서 강하게 항의도 하고, 석방 운동을 벌였는데요. 훗날 김문수 후보가 공개적으로 “제가 가장 어려웠을 때 유시민과 두 누이가 적극 나서서 도와준 것에 거듭 감사를 드린다”며 유시민 작가와 두 누이 유시주‧유시춘 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 세 사람이 같이 경기도지사에 출마하게 된 겁니다. 당시 선거 상황을 들여다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후 노 전 대통령의 가장 적통이라 볼 수 있는 유시민 작가의 지지율이 올라갑니다. 한때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박근혜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요. 처음에는 유시민 작가가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다가, 한명숙 전 총리가 서울시장 후보로 가고, 유시민 작가는 경기도지사 선거로 옵니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국민참여당 소속으로 민주당 김진표 후보와 단일화 해서 출마했는데, 심상정 진보신당 후보가 선거 전날 사퇴를 하면서 사실상 ‘김문수 vs 유시민’의 맞대결이 됩니다. 결국 김문수 후보가 득표율 52.2%로 경기도지사 재선에 성공합니다.


요즘 김문수 후보가 자신이 경기도지사 때 일을 잘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실제로 평가가 좋았습니다. 경기도지사 당선되자마자 서울시와 협의해 대중교통 환승하면 깎아주는 통합 요금제를 처음으로 도입했고, 경기 북부와 남부를 서로 이어주는 경기순환버스도 도입했죠. 또,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를 기획한 사람이 바로 김문수 지사입니다. 교통에 대해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고, 성과도 낸 건데요. 광교‧판교 신도시도 개발했고, 규제 풀어서 삼성전자 고덕 단지를 평택에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11년 소방서에 전화해 “나 도지사 김문수입니다”고 한 녹취가 공개되면서 ‘갑질 논란’으로 삐끗하죠. 김문수 후보는 “전에 길 잃고 헤매던 어르신의 구조요청 전화를 남양주 소방서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사건 후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 확인하려 전화를 했었다”면서 “그런데 소방관이 장난 전화로 취급했던 상황”이라고 설명했는데요. 김 후보는 “소방관들 고생하는데 불편을 끼쳤던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송구스럽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김문수의 첫 대선 경선, 박근혜 이어 2등

김문수 후보는 대통령 꿈이 계속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한 그 대선 경선에, 김문수 후보가 경기지사 타이틀을 달고 도전했었는데요. 김동연 경기지사가 도지사 타이틀 달고 민주당 대선 경선에 도전한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때도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해 “이 시대가 원하는 리더십은 통합의 리더십인데, 세습된 리더십으로는 통합이 약하지 않겠느냐. 5·16이 불가피하다고 하는 말은 헌법에 안 맞는 말씀”이라면서 비판을 했죠. 그런데, 워낙 그때 박근혜 전 대표 적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경선에서 박 전 대표가 84% 압도적인 격차로 선출됐는데, 이때 8.7%를 얻어 2등을 한 사람이 바로 김문수 후보입니다. 이때부터 대통령의 꿈은 계속 있었던 겁니다.

도지사는 3선까지 할 수 있는데, 대선 후 김문수 지사는 3선에 도전하지 않습니다. 2014년 1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당에서 정치 개혁을 해보겠다”고 밝혔는데요. 이 때 ‘경기도지사 3선 불출마’가 대통령 꿈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해석도 많습니다. 경기지사를 3선 해서는 대통령에서 더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경기지사들이 모두 대선주자로 올랐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적이 없었죠. 그래서 경기지사가 ‘대통령의 무덤’으로 불렸을 정도인데요.

어쨌건, 경기지사 불출마를 선언한 김문수는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을 맡습니다. 그때 당대표는 1996년 입당 동기인 김무성 대표였습니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낙마했을 때, 김무성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후임 총리로 김문수를 추천했었다는 일화도 있는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과 김문수 후보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습니다. 김문수 후보는 오히려 이명박 대통령하고 조금 더 친했고, ‘비박’으로 불렸죠.

당 보수혁신 작업을 맡은 김문수 위원장은 당시 “청렴영생 부패즉사(청렴하면 영원히 살고, 부패하면 바로 죽는다). 깨끗한 정치를 이루지 못하면 어떤 정치적 타협도 죄악이다. 국회의원들이 모든 특권을 내려놓는 정치를 해야 한다. 헌법적 특권을 방패 삼아 범죄자를 감싸는 이런 국회는 필요 없다”고 했었는데요. 지금도 같은 이야기를 하죠. 이번 정치 개혁 공약에서도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도 불소추 특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권, 부정부패에는 엄격했던 건데요. 그런데 이 보수혁신위원장 이후 안 풀립니다. 김문수의 정치적 암흑기가 시작되죠.


▶ 6년 암흑기→아스팔트→장관→대선후보로

김문수 후보는 2014년 경기도지사 퇴임 이후, 선거에서 줄줄이 떨어집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는데, 이때부터 좀 비판을 받았죠. 보통은 의원 3선까지 하면 험지로 가는데, 험지(부천 소사)에서 당선됐던 사람이 대구 수성갑이라는 보수정당의 양지로 내려갔기 때문인데요. 당시 상대는 민주당 김부겸 후보였습니다. 두 사람도 과거 인연이 있죠. 같은 경북고등학교 출신에 민주화운동도 같이 했던 동지입니다.

당시 대구 수성갑이 지역구였던 이한구 의원이 공천심사관리위원장을 맡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김문수 후보가 그 자리로 내려갔던 건데요. 김문수 후보가 내려간 이유는 김부겸 후보가 워낙 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김부겸 후보가 본인 경쟁력을 상당히 세게 갖고 있어서 여론조사에서 누구를 붙여도 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장이 될 사람을 붙인다면서 ‘강력한 사람’으로 내려보낸 게 김문수 후보였던 거죠.

하지만, 김문수 후보는 대수 수성갑 선거에서 떨어집니다. 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대구 1석을 내주게 된 건데요. 김문수 후보 탓만 할 순 없는데, 이때 새누리당 공천이 엉망이 됐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옥새 파동’을 벌였고, ‘진박 논란’으로 시끄러웠죠. 그러면서 결국 김부겸 62.3% 대 김문수 37.69%로 새누리당이 대구에서 대패를 합니다. 당시 민주당 입장에서는 ‘수성 대첩’이라고 할 만큼 큰 차이로 이기죠. 새누리당은 그야말로 ‘수성 쇼크’, 엄청난 타격을 입습니다.

2년 뒤, 김문수 후보가 서울시장에 도전하는데 또 집니다. 이때도 비판을 받죠. 경기지사 하다가, 대구 내려갔다가, 이번에는 서울시장에 왜 나오냐는 겁니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라 보수 정당에겐 워낙 어려웠을 때잖아요. 결국 김문수 후보가 거의 2배 차이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참패를 하죠. 이후 정치인 김문수는 세 번째 변신을 합니다.


정치인 김문수의 세 번째 변신, 이번엔 ‘비주류 소장파 정치인’에서 ‘아스팔트 보수’가 됩니다.

이때 김문수 후보의 활동을 보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잘나갈 때는 그렇게 맞서 싸우더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는 ‘박근혜 지킴이’가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막는 게 인간적인 도리”라면서 탄핵 반대 집회에 나가 아스팔트 보수로 활동을 한 건데요.

김문수 후보는 자유한국당을 탈당하고, 2020년 전광훈 목사와 기독자유통일당을 창당하기도 했죠. 당시 김 후보는 “청와대, 국회, 대법원, 방송, 민노총, 전교조, 지자체까지 모두 적화가 됐다. 자유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기 위해 자유통일당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세게 했던 인물이 보수정당 정치인으로 변신을 했어요. 그때도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의 힘을 갖고 가다가, 완전히 ‘아스팔트 보수’로 바뀐 거예요. 물론 김문수 후보의 일관되는 청렴과 비주류적인 시각은 이어졌지만, 이때의 이력이 중도로 확산하는 데에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대목이죠. 건국절과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뉴라이트 역사관도 공격 받는 포인트가 되기도 하는데, 본인은 “자유에 대한 소신”이라고 얘기를 하고요. 최근엔 “이제 자유통일당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소통도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김문수 후보가 ‘아스팔트 보수’로 변하면서 중앙 정치에서 멀어졌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중앙으로 올라옵니다. 장관급인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위촉된 건데요. 당시 국회 국정감사에 나가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라는 발언을 해 퇴장당하는 등 또 논란이 됐었죠.

이어서 2024년 8월엔 고용노동부 장관이 됐는데요. 취임 첫날, 김문수 장관은 친노동자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근로기준법을 5인 미만 사업장에게도 적용하고, 노동약자보호법도 추진했죠. 노동자 임금 체불 전액 청산과 체불 사업주 엄벌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선주자로 떠오른 일이 생기죠. 계엄 사태가 터지고, 민주당 의원이 국무위원들에게 계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일이 있었죠. 다른 국무위원들은 다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사과할 때, 김문수 장관은 꼿꼿하게 자리에 앉아 사과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장면이 보수 진영의 대선후보로 떠오른 결정적 장면입니다.


그리고 대선 경선에서 득표율 56.53%로 한동훈 전 대표를 제치고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선출됩니다.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 협상에 실패하고, 후보 교체 위기도 겪었지만, 기사회생해서 대통령 선거에 나선 상황입니다. 과연 이번 대선에선 어떤 결과지를 받아들까요?

김문수 후보의 긴 정치 인생을 쭉 정리해 봤는데요. 이전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정치인생 편과 함께 비교를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퀴즈 나갑니다!


정답 아시는 분은 유튜브 영상 밑에 댓글 남겨주시면 제가 다섯 분 추첨해서 선물 드리겠습니다. 복잡한데 궁금한 이슈도 댓글로 남겨주시면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아시죠? 평일 오후 7시엔 <뉴스A> 주말 오후 3시엔 <동앵과 뉴스터디>.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구성: 동정민‧이남희 기자, 김정연 작가
연출: 황진선 PD
제작: 박현아‧신민철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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