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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후에 더 묵직한 이 영화 ‘하얼빈’

2025-11-17 11:21 문화

 사진=영화 '하얼빈' 스틸컷

멀리서부터 차가운 공기가 밀려드는 지금, 떠오른 영화는 ‘하얼빈’이다. 파랗고 어두운 색감. 그 공기의 톤이 생각나서다. 영화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총칼 앞에 강제 박탈된 을사늑약 4년 뒤 1909년, 하얼빈으로 향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군들의 이야기다.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 벌어졌다. 오늘(17일)은 을사늑약 120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12월 24일에 개봉한 영화의 리뷰를 1년이 다 흐른 지금 쓰게 된 이유다.

제작비 300억 원이 든 영화는 반년에 걸쳐 몽골, 라트비아, 한국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장엄한 자연을 배경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어깨를 누른다. 관객을 붙잡아야 할 초반, 박진감 넘치거나, 화려한 액션이 아닌, 잔인하고 처절한 죽고 죽이는 살인으로써의 전투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대중적인 오락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만, 바로 이 지점이 기존 한국 영화들의 흥행 방식과 다른 노선을 걷는 하얼빈만의 방향성이다. 유머나 농담도 없다. 그들을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당시 짓눌렸던 독립군들의 투쟁과 시대의 아픔을 1시간 54분 동안 고스란히 느끼도록 한다. ‘거사’를 앞둔 긴장감과 첩보적 요소로 영화적 재미는 충분하다.

배우들의 연기도 남다르다. 여러 배우 중 조우진과 현빈의 연기를 짚어보고자 한다. 조우진은 독립군 김상현 역을 맡아 일본군 장교로부터 고문당한다. 동물 실험체처럼 잔혹하게 말이다. 풀려난 뒤 일본군 장교는 식탁 위에서 개 먹이 주듯 스테이크 조각을 던져준다. 이 때 조우진은 고깃덩어리를 손으로 집어 씹어먹으며 울음도 함께 삼킨다. 살기 위해서 굴복할 수 밖에 없음에 눈물이 흘렀겠지만 눈빛은 활활 타올랐다. 독립군의 본질을 잊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 눈빛은 결말부의 복수에서 이어진다.

현빈은 조선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전 조선통감·내각총리대신)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직접 사살한 인간 안중근을 사실적으로 연기했다. 영화 내내 소리 내어 웃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일조차 없었다. 위험을 경고하는 최재형 선생 앞에서 “그러면 먼저 간 동지들은 어쩝니까?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라며 울먹인 것이 전부다. 사지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안중근의 의지 속에 가려진 아픔을,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닌 되려 절제함으로써 더욱 처절하게 그려냈다. 현빈은 언론 인터뷰에서 “마지막 촬영 후 오열했다. 압박감이 그만큼 컸다”고 했다. 현빈의 오열은, 안중근에서 벗어난 순간 터진 것이다. 짐작하건대 극한의 절제로 참고 참았던 감정이 현빈 본인으로 돌아온 순간, 마치 제를 지내며 그 사람을 보내며 목 놓아 우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절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면이다. 그 형식이 독특하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오전 9시 30쯤. 총성이 울리고, 감독은 클로즈업 대신 부감(피사체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을 보여준다. 상업영화에 기대하는 클라이맥스로 가는 대신 정반대인 역사화를 택한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그저 한 사람이 쓰러지고, 한 사람은 끌려갔을 뿐이다.

독립은 무려 36년이 흐른 뒤에야 가능했다. 영화 속 안중근은 빙판 위를 위태롭게 거닐며 카메라를 응시한다. 휘청이는 몸짓과 달리 눈빛은 곧게 뻗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날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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