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벌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4년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저서 '벌'에 적힌 말입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꽃과 식물들의 수정이 꿀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만큼 꿀벌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입니다.
그런데 이 벌이 지난해부터 한반도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초 최소 61억 마리가 사라졌는데, 올해는 그 두 배가 넘는 141억 마리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벌통의 61.4%에 달합니다.
‘월동기를 지낸 농가들의 시름이 상당할 텐데….’ 꿀벌 실종으로 피해를 입은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했습니다.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들의 수분이 한창이어야 할 이 때, 양봉 농가와 과수 농가를 찾았습니다.
‘생산비 상승, 수확량 급감’…시름에 빠진 과수 농가들
새하얀 배꽃과 분홍빛 복숭아꽃이 아름드리 핀 경기 이천의 과수 농장. 농장주 석재인 씨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양봉 보호복을 입은 채 일했습니다. 당시엔 꽃을 찾아온 벌들의 벌의 날갯짓과 윙윙거리는 소리가 농장을 가득채웠다고 하는데요. 취재진이 지난 13일 찾아간 농장은 달랐습니다.
“옛날에는 꽃을 못 만질 정도였어요. 벌들이 하도 많아가지고. 꽃 반 벌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도 안 보이잖아요, 벌이.” - 과수 농민 석재인 씨
석 씨는 결국 인공 수분기를 구입했습니다. 기다란 막대 끝에 달린 깃털을 꽃 송이마다 가져다 대며 꽃가루를 묻혀줬지만 결과는 생산비 상승, 수확량 급감이었습니다. 수확량은 20%나 떨어진 겁니다.
“지금 시골은 인력이 고령화됐기 때문에 그나마 젊은 사람들이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다른 일을 못 하고 일단 배부터 달리게 하려고 여기에 노동력을 투하하니까 인건비가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농가 경영에 굉장히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 과수 농민 석재인 씨
석 씨가 배나무에서 30분가량 수분 작업을 하는 동안 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복숭아나무로 자리를 옮긴 뒤 촬영이 시작되고 1시간쯤 지나서였을까. 꽃잎에 붙은 벌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오 벌이다...! 벌이다!” 석 씨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벌”이라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폐농, 먼 얘기 아니다”…사라지는 꿀벌, 그리고 양봉 농가
석 씨 농장으로 날아들던 꿀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농장 반경 2km 내에는 양봉 농장이 세 곳이나 있었습니다. 이 곳에 어떤일이 생긴 건지, 연락을 취했습니다.
첫 번째 양봉 농가. 취재를 요청했지만 한사코 거절하셨습니다. 농민은 “망한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보이냐”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80통 있던 벌통 중 70통에서 꿀벌이 집단 폐사해, 지금은 열 통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 양봉 농가. 지난해 겨울 이미 한 차례 피해를 겪은 터라 노심초사하며 정성껏 키웠지만, 벌통 100개는 올 봄 10통으로 줄었습니다. 양봉과 복숭아 농사를 병행하는데, 양봉을 접어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그냥 벌 농사도 이제 힘들겠구나. ‘더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 생각이 들죠. 조금 살아 있으니까 또 한 번 해보려고 하는 거죠, 뭐.” - 양봉업자 임종규 씨
그리고 마지막 양봉 농가. 1980년에 양봉업을 시작한 정남섭 씨는 4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올해 꿀벌이 집단 폐사하면서 끝내 폐농을 결정하고 양봉조합에서 탈퇴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하는 게 목표였다”며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착잡한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죠. 이거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고, 벌만 왕성하면 친구들 부르고 사람 고용해서라도 좀 시키겠는데… 벌이 줄어드는데 하면 뭘 해.” - 폐농 양봉업자 정남섭 씨
양봉농가 세 곳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과수 농장에 벌들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생하며 살아가던 이들 사이에 더 이상 벌은 없었습니다.
꿀벌 실종을 양봉농가만의 문제로 볼 수 있을까요? 유엔식량기구는 100대 농산물 생산량에서 꿀벌의 기여도를 71%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벌들이 꽃가루를 옮겨 날라주지 않으면 열매를 맺는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나비효과가 아닌 꿀벌효과로 우리의 밥상까지 위협받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정부가 이 사태를 좌시해선 안 되는 이유입니다.
*뉴스A의 코너, ‘현장카메라’와 ‘다시간다’에 담지 못한 취재 뒷이야기를 풀어냅니다.
▷ [다시 간다]꿀벌 실종 3년…사오는 값도 2배 <뉴스A, 지난 18일>
[기사 링크
: https://www.ichannela.com/news/main/news_detailPage.do?publishId=0000003439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