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 재산은 5억 2천만 원”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 취임 직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재산이 연희동 자택과 주식, 예금까지 5억 2천만 원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5년 뒤 퇴임 직후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랜저 승용차 한 대 늘어난 것 말고는 (재산이) 그대로다”라고요. 청렴한 대통령이라는 국민들의 평가는 2년 만에 산산이 깨집니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이 예금증서를 흔들며 폭로를 했거든요. 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 비자금 4천억 원을 각 시중은행에 100억씩, 모두 40개 계좌에 나눠 예치시켰다고요.
박계동 의원의 폭로 8일 뒤인 10월 27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비자금을 시인합니다. 재임기간 5년 동안 약 5천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면서 사과하죠. 이날 오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도 베이징 방문 도중 숙소에서 기자간담회를 전격 개최합니다. 1992년 대선 당시 20억 원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받았는데 절반은 당에 주고, 절반은 선거에 썼다고요. ‘위로금’으로 생각했다며 이 외에 노 전 대통령에게 받은 돈은 없고, 오히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에게 수천억 원을 받았다는 정보가 있다며 공세를 펼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부인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회고록에 ‘김영삼에게 3천억 원을 줬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잣대로는 불법인 자금들이 오히려 보편적이었던, 우리 정치권의 ‘흑역사’ 가운데 한 장면이겠죠.)
이렇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 박계동 의원의 폭로 1달 뒤인 11월 16일 노 전 대통령이 구속됩니다. 그리고 1달 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40여 개 대기업에서 적게는 50억 원, 많게는 350억 원씩 받아 모두 4189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이것을 여러 사람과 기업에 맡겨뒀다고 결론 내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 대부분이 돈을 건네거나 혹은 맡아줬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검찰이 재판에 넘겨서 처벌받게 할 수 있는 액수는 2800억 원 정도였고, 이나마도 재판 과정에서 일부 불인정되면서 1997년 4월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2628억 원의 추징금을 내라고 확정 판결합니다.
▶‘세기의 이혼’ 한복판에 등장한 비자금
노 전 대통령이 2013년 9월 추징금을 완납하면서 잊힌 비자금 사건은 10년 만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재등장합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첫해에 결혼했던 딸 노소영 관장이 최태원 회장과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갑자기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이 현 SK에 유입됐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야기인즉,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최종현 SK 선대회장에게 비자금 300억 원을 건넸다는 것입니다. 최종현 회장은 이것을 되갚는다는 징표로 50억 원 약속어음 6장을 노 전 대통령에게 건넸고요. 이후 김옥숙 여사가 추징금을 내기 위해 이 가운데 2장을 SK그룹에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면서, 남은 4장의 어음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노 관장 측은 SK가 비자금 300억 원을 종잣돈 삼아 그룹을 키웠으니, 노 관장이 그룹 성장에 그만큼 기여했다는 입장입니다. 당시 선경그룹은 1991년 12월 현 아모레퍼시픽, 당시 태평양의 계열사였던 태평양증권을 570억 원에 인수하기로 합니다. 당시 선경 측은 최종현 회장이 개인 돈으로 인수자금을 마련한다고 했는데, 이듬해 정주영 당시 국민당 대표(현대그룹 명예회장)가 비자금으로 인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당국 역시 자금 추적에 들어갑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자금 출처가 밝혀지지 않죠. 나중에서야 SK는 계열사 자금이 사용됐다고 인정합니다. SK 계열사들이 자금을 각출한 다음 사채시장을 거쳐 ‘세탁’을 한 뒤에 최종현 회장 계좌로 입금되어 최종적으로는 최종현 회장 개인 자금으로 인수된 것처럼 처리됐다는 것이죠. 계열사 자금으로 그룹 대주주가 투자행위를 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당시에는 안 밝혔던 거죠. 결과적으로 SK는 노태우 비자금 300억으로 태평양 증권 인수한 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비자금 메모와 약속어음
노태우 비자금 300억 원의 SK행을 인정한 항소심 재판부는 노소영 관장이 제시한 세 가지 근거를 받아들였습니다. 앞서 증거로 제출한 약속어음 4장과, 노 관장의 모친인 김옥숙 여사가 작성한 포스트잇 메모 2장입니다. 1998년 4월 1일, 1999년 2월 12일자로 작성된 메모에는 사람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는데, 노 관장 측은 이것이 비자금을 맡겨놓은 사람과, 얼마를 맡겨뒀는지 기록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메모에 적힌 대표적인 인물들을 몇 살펴볼까요. 노재우, 노 전 대통령 동생에게는 모두 341억이 맡겨져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선경에 300억이 맡겨져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문제의 비자금 300억을 의미하는 것이죠. ‘최 서방 32억’이라는 문구도 발견되는데, 노 관장 측 설명에 따르면 사위인 최태원 회장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죠. (이 밖에도 메모에는 정해창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병기 전 의전비서관 등 노 전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다수 기재돼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채권 봉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약속어음이 담겨 있던 봉투인데, 대봉투에는 ‘채권 500억-쌍용, 선경’이라 적혀있고, 각각 ‘쌍용 200’과 ‘선경 300’이라는 소봉투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봉투에 쌍용 측 차용증서 20장과 선경 측 약속어음 6장이 각각 들어 있었다는 건데요. 그런데 쌍용 측 차용증서 20장은 이미 검찰의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추징 과정에서 인정된 적이 있습니다. 김석원 당시 쌍용그룹 회장이 노 전 대통령 비자금 200억 원을 관리했다는 것이 법원에서 확인된 것이죠. 따라서 선경 측 약속어음 역시 유사한 성격의 비자금 증표로 봐야한다는 게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입니다.
▶“비자금 받은 게 아니라, 노후자금 준 것”
SK에선 모두 인정하기 어렵다고 반박합니다. 우선 손길승 전 SK 회장의 말을 들어보죠. 손 전 회장은 선경직물 평사원에서 시작해 그룹 회장까지 올라, ‘한국 최고의 전문경영인’,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우죠. 그만큼 SK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인물인데요. 손 전 회장은 약속어음을 준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노 전 대통령 측근이었던 이원조 당시 경제비서관이 노 전 대통령 퇴임 직전 찾아와 품위 유지비 성격의 돈을 요구했고, 사돈지간이니 주겠다고 했는데 그러자 증표까지 달라고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손 전 회장이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물어보고 선경건설 어음을 줬다는 설명입니다. 비자금을 준 대신 받은 차용증이라는 노 전 관장 측 주장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인 것이죠. SK가 비자금을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퇴임 후 품위 유지비를 주겠다고 한 증표라는 겁니다. 그 어음은.
비슷한 이야기가 노 전 대통령 측 인사들에게서도 나옵니다. 윤석천 전 제1부속실장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돈을 줬다면 노 전 대통령이 준 게 아니라 SK 최종현 회장이 줬을 것, 그게 상식이라는 것이죠. 제1부속실이 대통령의 ‘문고리’로 불리는 곳이니,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인 건 분명하죠.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도 노후자금 성격으로 SK가 돈을 챙겨준 것이라고 했다고 한 언론인이 전하죠. SK 측 설명에 힘을 싣는 노 전 대통령 측 증언입니다.
이 밖에도 SK 측은 조목조목 비자금 유입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당시 선경이 태평양증권을 인수했다고 발표한 게 1991년 12월의 일인데, 선경건설 명의 약속어음이 발행된 시점은 1992년 12월입니다. 인수 발표가 난 지 1년 뒤에야 어음이 발행됐다면, 이 돈으로 인수를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냐는 것이죠. 시점이 안 맞는다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맡겨둔 돈이 있으면 진작 안 찾아간 이유가 뭐냐는 의문도 제기합니다. 추징금 납부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동생 노재우 씨와 사돈이었던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에게 ‘돈 돌려 달라’며 소송까지 냈거든요. 그런데 SK에는 왜 아무 말을 안했냐는 것이죠.
김옥숙 여사의 메모에 대해서도 SK 측은 할 말이 많아 보입니다. 김 여사가 여기저기 받을 돈이 그렇게 많다고 적어뒀는데, 정작 그 당시 김 여사가 일기장에는 ‘돈이 전혀 없다’, ‘자동차 한 대 살 돈도 없다’면서 생활고를 토로했다는 것이죠. 돌려 받을 비자금이 있었다면 그렇게 힘든데 왜 그 때는 이야기를 안 했냐는 반박입니다.
최태원 회장 측 변호인단은 항소심 과정에서 이 메모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다면서 필적 감정, 나아가 김옥숙 여사를 증인으로 불러 신문하려 했지만 재판부에서 모두 기각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될 대법원의 이혼소송 상고심 과정에서도 이 메모는 쟁점이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노소영 폭로’의 나비효과
비자금 300억 원 폭로의 여파는 법정 밖에서도 컸습니다. 기존 검찰 수사에 없었던 비자금이 새로 발견된 것이다 보니, 국정감사 과정에서도 질의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김옥숙 여사 메모가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되면서, 메모 내용대로면 수백억 원의 비자금이 더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옵니다. 안도걸 민주당 의원은 비자금 증여가 법원에서 인정된 것이므로 국세청에 추적을 당부했고, 정청래 민주당 의원도 증여세 포탈과 돈세탁 의혹 등 불법 자금 은닉을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죠.
불똥은 노소영 관장의 동생인 노재헌 씨에게도 튑니다.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은 노재헌 씨가 국내 비거주자 신분(2년 이상 해외체류 중인 국민)을 의도적으로 유지해서 해외에 자금을 은닉하고, 세무조사와 과세를 피하고 있는 의혹이 있다고 했고요. 김영환 민주당 의원은 노재헌 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동아시아문화센터가 수상하다고 말합니다. 이곳에 김옥숙 여사가 2016년부터 매년 조금씩, 지금까지 모두 147억 원을 기부했고 2022년 설립된 노태우 센터에도 5억 원을 기부했는데, 150억 원이 넘는 돈이 어디서 났느냐는 것이죠. 기부가 아닌, 비자금 증여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입니다.
의원들의 질의가 쏟아지니까 정부도 살펴보겠다고 합니다. 심우정 검찰총장은 관련 고발이 3건 들어온 상태이며, 수사팀에서 비자금을 수사할 수 있는지 법리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민수 국세청장도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다면 세무당국 차원의 조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고요. 이 밖에도 정치권에서는 사망 후에도 범죄수익을 몰수할 수 있는 시효를 없애는 법안이 여럿 발의됐습니다.
이쯤 되면 노소영 관장이 ‘비자금 300억’을 왜 들고 나왔는가, 궁금해집니다. 본인을 포함해 가족들을 둘러싸고 논란이 생길 것이 뻔한데 말이죠. 노 관장도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려지면 많은 억측과 불필요한 논란으로 가족 간 화합에 장애가 되고, SK그룹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그간 비자금 300억은 ‘가족들만 아는 비밀이었다’고요. 하지만 관계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양해를 얻어 증거로 제출했다는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 일가는 이 상황을 감수했다는 뜻이죠.
결과적으로는 ‘비자금 300억’을 근거로 항소심에서 재산분할 액수가 1조 원 넘게 인정됐기 때문에, 소송 전략 차원에선 성공한 폭로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정치권으로까지 불길이 번지면서 이혼 소송에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더라도 향후 논란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물론 이혼 소송이 대법원 상고심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역시 섣불리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고요. 이혼소송에서의 승패와 비자금 수사, ‘노태우 비자금 300억 원’이라는 양날의 검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퀴즈 나갑니다.
정답을 아신다면 유튜브에 ‘동앵과 뉴스터디’를 검색해서 해당 영상에 댓글 남겨주세요. 추첨을 통해 시원한 커피를 드립니다.
평일 오후 7시엔 <뉴스A>, 주말 오후 3시엔 <동앵과 뉴스터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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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동정민 기자, 김정연 작가, 정현우 기자
연출: 황진선 PD
편집: 허수연‧박현아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