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한 장면(바이포엠스튜디오)
"바둑의 신하고 둔다고 해도 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 영화 '승부' 중 조훈현(이병헌) 대사
적수가 없던 조훈현이란 태양은 공교롭게도 그의 제자 이창호의 손에 의해 기울게 된다. 그것도 집에 함께 살며 기술과 인성을 가르쳤던 내제자(內弟子)다.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패하는 순간, 영화 속 카메라 구도는 조훈현의 시선이 180도 뒤집히듯 기울어진다. 조훈현도 추락하고 추락한다.
"하던대로 하쇼. 이렇게 숨죽이고 웅크리는 거 당신하고 영 안 어울려."
- 영화 '승부' 중 남기철(조우진)의 대사.
과거 라이벌 남기철의 직언 때문일까. 부인 정미화(문정희)의 조언 때문일까. 조훈현은 다시 바둑의 세계로 돌아오고, 이제 자신이 도전자가 되어 제자 이창호를 상대하게 된다.
'우러러 보던 스승을 이긴 제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조훈현의 도전은 다시 성공할 수 있을까.'
화려한 액션 없이도 오밀조밀하게 이야기를 쌓아내는 영화는 그렇게 한 수, 한 수 끝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묘미는 단연 조훈현과 이창호를 해석한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다. 한국 최고의 배우들이 그려내는 최고의 바둑기사들의 얼굴을 보는 재미가 영화의 8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훈현의 변화무쌍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이병헌의 연기에 질세라, 유아인은 독보적인 이창호 연기를 그려낸다. 영화 속 사제대결처럼 '연기대결'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둘째는, 그 시절의 낭만이다. 멋있게 제목을 뽑아 낸 신문 기사, AI가 없던 시절의 기원과 TV 대국 중계, 대국의 배경이 되어 주는 한국의 4계절이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다. 돌이켜보면 80-90년대 한국에서 바둑은 세계 대회에서의 성과 속에 말 그대로 열풍이었다. 몇 안 되는 지상파 채널에서 대국을 중계했고, 부모들은 두뇌개발을 위해 자녀들을 바둑 학원에 보냈다. 정답은 없어도 답을 찾는 곳 바둑판은 인생을 축약한다.
셋째, 세기의 사제 대결이라는 실화의 힘이다. 15세에 처음 스승을 꺾은 이창호는 남은 대회들의 타이틀을 하나하나 빼앗아 올 때까지 스승의 집에서 지냈다. 조훈현은 "타이틀을 잃는 것은 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제자에게 빼앗기는 게 낫다"고 말했다.
바둑은 흑과 백이 돌을 교대로 놓아가며 때론 공격을, 때론 방어를 하는 승부의 연속이다. 작은 바둑판 안에 무수히 많은 수가 있으며, 결국 누가 더 많은 집을 지었는지로 승패를 계산한다. 고수들에게는 저마다의 기풍이 있는 법. 조훈현은 '제비', '전신(전투의 신)', 이창호는 '석불(돌부처)'이라는 별칭이 붙는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런 기풍은 영화에서 피상적으로 그려질 뿐이다. 실제 대국을 보여주지 않아 바둑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될 수도 있어 보인다.
대신 영화가 대국이 아닌, 인물의 감정과 고뇌, 그리고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만큼, 바둑이 생소한 일반 관객들이 영화를 이해하기에는 수월하다. 조훈현 역의 이병헌도 바둑을 잘 몰라 돌 두는 연습을 오목으로 했다고 한다.
마음을 비운(무심 無心) 스승과 정성을 다해서(성의 誠意) 대국에 임하는 제자의 명국(名局)들을 지켜보다보면, 관객들은 끝내 그들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