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멘트]
올해는 다산(茶山) 정약용 탄생 250주년입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
교육자이기도 했던 다산!
수식어 만큼 다양한 관심사와 재능,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는데요.
다산이 현대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DBR 김남국 편집장과 함께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리포트]
1. 지난 16일이 다산 정약용의
탄생 250주년이었는데..
다산 정약용 어떤 인물인지부터 짚어 볼까요?
(다산, 그는 어떤 인물인가?)
실학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 실학자. 1762년 태어나 올해가 탄생 250주년. (1836년 사망)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는데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 어려서 영특. 4세에 천자문, 7세에 한시, 10세에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이란 시집을 편찬. 천연두 때문에 눈썹 자국이 생겨 눈썹이 세 개여서 삼미(三尾)라 불림. 22세에 초시 합격, 성균관 재학 시 정조에게 인정받았고, 28세 대과에 2등으로 합격해 벼슬길 나가 출세. 이후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관직은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해서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정3품) 등으로 승승장구. 요즘으로 치면 초고속 승진.
2. 초고속 승진을 하가다 돌연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1,2년도 아니라 18년이란 긴 유배를 떠나잖아요?
무슨 대역죄라도 지은건가요?
(18년의 긴 유배생활, 왜?)
(신유사화 이후, 강진으로 유배)
승승장구하던 다산의 삶에 갑자기 변화가 생겨. 다산의 최대 후견인 정조가 세상을 뜨면서 고난 시작. 정조 사후 당쟁이 불붙으면서 신유사화 일어났고 천주교도로 몰려 형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 참화 당했고 정약용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강진으로 유배. 무려 18년간 유배생활.
3. 정약용 입장에선 정말 잘나가다가
이런 일을 당해 충격이 컸겠어요?
흔히, 잘나가던 사람들이 속칭 "물을 먹게 되면"
크게 분노하거나 좌절해서
무너지는 경우를 가끔 보게되거든요?
(유배지,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귀양살이 ‘학문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유배지에서 다산 학문의 최고조로 승화)
(자득(自得)의 경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
(유배지서, 300권의 책 저술)
유배 생활은 힘들었다. 천주교인으로 소문나서 유배지에서조차 모두가 정약용을 모른척했다. 요즘 말로 치면 ‘왕따’ 당한 것이다. 환난으로 궁벽한 곳에 처했기 때문에 다산은 자칫 혹독한 시련을 준 운명을 원망하거나 정적에 대한 분노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지만 그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양살이를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최고의 학문의 꽃을 피웠다. 다산의 삶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이것이다.
중용에 보면 “군자는 자신의 운명에 합당한 행동을 하니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귀한 운명이 오면 부귀한 행동을 하고 빈천한 운명이 오면 빈천한 자로서 합당한 행동을 한다. 오지에 처하면 오지의 문화를 즐기고, 환난의 운명을 당하면 환난의 길을 걸으리라. 군자는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 안에서 해답을 찾는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군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조급하게 요행을 바란다.”는 구절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군자는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만의 답을 얻어낸다. 다산은 자득(自得)의 경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생각으로 다산은 학문에 매진해 무려 300권의 책을 저술했다.
4. 그런데, 조선시대 유배지 생활이란 것이 어떻습니까?
먹고 힘든 경우가 많다던데..
건강도 좋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구요?
(팍팍한 유배생활, 어떻게 버텼을까?)
다산은 굳은 의지를 보여줬다. 운명에 담담하게 맞서면서 학문의 길에 매진했는데, 중풍이 걸려 손이 마비됐을 때 다산은 붕대로 붓을 손에 묶고 책을 써냈다. 한 번은 산에 올라가려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소에 자신의 몸을 묶고 산에 올랐던 일화도 있다. 힘들고 어렵지만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다산의 삶은 과학기술 발달로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5. 다산 정약용을 '조선의 다빈치'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다산은 서양 학문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 인물로도 유명하잖아요?
(최대 관심 분야는 과학?)
다산은 젊었을 때부터 서양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다산의 위대함은 단순한 피상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데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고 연구를 하며 더 좋은 국가 체제를 만들고, 백성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수원 화성 기중기를 만들었고 종두법도 연구했다. 그의 관심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어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린다. 사회 계약설 취지의 주장도 앞서 폈다.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창한 인물. 심지어 엑셀의 원리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한 기록도 나온다.
5-1. 200년 전에 엑셀의 원리를 이용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요?
(조선시대, 엑셀의 원리를 이용하다?)
정조가 식목 사업을 마무리하고 논공행상을 위해 각 고을별로 얼마나 나무를 심었는지 파악하게 했다. 그런데 나무 종류가 다 달라서 이걸 취합하는게 어려웠다. 다산은 세로 줄에는 날짜를, 가로 줄에는 나무 종류를 표시하도록 해서 이걸 취합해 단 한 장에 정리해서 정조에게 보여줬다. 정조는 “책 한권 이내로 정리하라고 했더니, 이걸 단 한 장에 정리했다. 기특하다”고 말하기도.
7. 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평생 머리맡에 두고 교훈으로 삼았던 책이
'목민심서'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 정치인들도 한번 쯤 읽어보면 어떨까 싶어요?
(목민심서, 현대 정치인에게 告하다)
(생활밀착형 정치 강조)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율기(律己) 6조'를 읽어 보길 권한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평생 머리맡에 두고 교훈으로 삼았던 목민심서의 첫 대목이다. 다산 선생이 공직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꼽았던 여섯 가지는 첫째가 바른 몸가짐(飭躬), 둘째가 청렴한 마음(淸心), 셋째가 집안을 잘 다스리는 일(齊家), 넷째가 청탁을 물리침(屛客), 다섯째가 씀씀이를 절약함(節用), 여섯째가 베풀기를 즐겨함(樂施)이다. 당선의 영광을 얻은 이들은 꼭 여섯 가지 경구를 가슴에 새기길 바란다. 특히 율기의 기본인 칙궁은 몸에 배도록 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어 기거함에 절도가 있고 관대는 단정히 하며 백성들을 대할 때는 장중하게 해야 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성공학 노트
가혹한 운명을 원망하지 마라.
두려운 것은 가혹한 운명이 아니라 운명에 굴복당하는 약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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