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요, 호외!"
긴급한 소식을 알리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소년들...
신문팔이로 불리거나 신문배달원으로 불리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신문박물관(서울 광화문역 5번 출구 앞)은 오는 3월 2일(일)까지 신문박물관 6층 '미디어 라운지'에서 <호외요, 호외!> 전시를 엽니다.
신문박물관 측은 "신문배달원은 고학(苦學)의 상징이자 뉴스의 전령이었다"면서 "소년의 작은 발은 '외딴 섬 먼 바다(절해)부터 높고 가파른 산골(준령)까지'(동아일보 1966년 4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 저널리즘을 전했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또 "1950~70년대의 신문배달원은 주로 넉넉치 못한 경제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신문사를 찾았다"면서 "운이 좋으면 보급소의 정식 배달원이 되어 숙식을 해결하고 이른 아침부터 시가지를 누볐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호외가 발행된 날에 갓 나온 호외를 한아름 받아들고 뛰며 도시 곳곳에 흥분과 감동을 전하는 것이 이들의 중요한 역할이었다"며 "이러한 모습은 성실함의 표상으로서 또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숨은 주역으로서 다양한 대중문화 속 클리셰로 남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은 신문배달원의 사료, 구술 채록, 사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신문배달원의 시점에서 집집마다 신문을 투척하면 점수를 얻는 방식의 게임, '페이퍼 보이(Paperboy) / 미국 아타리 게임즈 1985년 작'도 즐겨볼 수 있습니다.
신문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일정 시대인 1920년대 후반 신문배달원의 월 급여는 10원~17원이며, 1929년 기준 배달 감독 또는 부감독은 월 급여로 45~60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와세다 대학 출신 30세의 기자의 초봉 50원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1980년대 신문배달원의 월급은 10만 원입니다.
신문박물관이 '이제는 거리에서 사라진 신문 배달 풍경을 재조명'하는 만큼, 이번 '호외요, 호외!'전시는 가족과 연인이 함께 관람하기에 부담이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