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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철에 바친 일생…故 박태준 발자취

2011-12-14 00:00 경제

앵커>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포철신화’를 일군 철의 사나이이자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박 회장을 오랫동안 취재했던 동아일보 홍권희 논설위원을 모시고 박 회장의 발자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홍 논설> 네, 안녕하십니까?

앵커> 먼저 ‘철의 사나이’로서 박 회장에 대해 알아볼까요?
박 회장이 제철산업에 뛰어든 계기가 궁금한데요.

홍 논설> 네, 박 회장이 철강산업에 발을 들인 건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8년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 임무를 부여받았는데요.

당시 돈도, 기술도, 경험도 없어 공장 건설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특히 국제차관단이 약속을 뒤집어 자금조달이 안 돼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죠.

박 회장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사용하자는 발상을 내 1970년 마침내 착공하게 됐습니다.

고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시죠.


"1970년 4월 여기에 삽을 넣을 적까지는 제철공장을 건설해 본 경험이라고는 저희나 여러분이나 전혀 없었습니다."


앵커>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군요.
포항제철, 지금은 포스코죠.
41년이 지난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회사로 성장했는데요.
박 회장이 밑거름이 됐죠?

홍 논설>네 그렇습니다

고인은 "조상의 피의 대가로 짓는 제철소인 만큼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바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각오로 일하자"며 '제철보국'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1973년 6월9일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황금빛 쇳물은 한국의 조선 자동차 가전산업 경쟁력의 기반이 됐습니다.

박 회장은 포스코 역사 41년 가운데 26년을 최고경영자로 재직했는데요

1992년 세계적 철강상인 월리코프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 라는 칭송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일군 '포철 신화'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에 도전할 적에 솔직히 말해서 두려움이 앞섰고 여러가지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생사를 걸고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 굳은 결의를 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앵커>이번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한번 되짚어볼까요.

4선 국회의원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박 회장의 정치 인생, 어떤 계기로 시작됐나요.

홍 논설> 네, 박 회장의 정계입문은 군후배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으로 1980년 이뤄졌습니다.

이어 민정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고요.
1990년엔 당 대표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 대표에 오른 지 불과 보름만에 3당합당으로 최고위원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1992년엔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반 김영삼 진영의 선봉에 섰는데요.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면서 박 회장은 대선 직전 정치권을 떠나게 됩니다.

앵커> 박 회장은 포항제철을 외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정계에 뛰어들었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는데요.

김영삼 정부 시절엔 혹독한 시련도 겪었죠?

홍 논설> 네 그렇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불화는 포철에 대한 강도높은 세무조사로 이어졌고,
박 회장 역시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면서 4년동안 정치적 낭인으로 해외를 떠돌았습니다.

박 회장은 1997년 포항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정계에 복귀하는데요.

DJP 연대로 자민련 총재에 오르면서 정치적 재기에 성공합니다.

이어 김대중 정부에서 자민련 몫으로 국무총리까지 올랐다가 4개월만에 스스로 물러나면서 짧은 정치역정을 마감하게 됩니다.

박 회장은 한 때 대권 도전이라는 꿈도 꿨지만 철강왕의 신화를 정치판에서 이어가는 데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경제의 도약을 이끈 인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앵커> 홍 논설위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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